물폭탄 이천 덮친 뒤 이재민들 ‘망연자실’

“그냥 물에 휩쓸려 죽고 싶었어요”

3일 오후 이천 율면체육관 수재민 대피소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식사를 배식받고 있다. 윤원규기자
3일 오후 이천 율면체육관 수재민 대피소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식사를 배식받고 있다. 윤원규기자

쏟아지는 폭우가 경기지역을 휩쓸고 간 뒤, 삶의 터전을 잃은 이재민들이 늘어가고 있다.

3일 오전 11시께 이천 율면실내체육관엔 인근 주민 22명을 비롯해 외국인 근로자 등 87명이 머물고 있었다. 망연자실한 표정의 이재민들은 쉴 새 없이 비를 퍼붓는 하늘을 원망스럽게 올려다볼 뿐이었다.

출입구에 서서 야속하게 내리는 빗방울을 응시하던 웰빙농장 대표 김주현씨(55)는 “다시 일어날 자신이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날 오후 7시께 농장 인근 농수로 둑이 7m가량 무너졌고 흙탕물 파도가 3만3천여㎡에 달하는 김씨의 하우스 49동을 덮쳤다. 그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빗속에서 더 큰 피해를 막고자 목숨을 걸고 20㎏짜리 모래 자루 300여개를 날라 터진 둑을 막았다.

김씨와 함께 돌아간 농장은 그야말로 폐허였다. 통행로로 쓰이던 경사로는 모두 무너져 내렸고, 산기슭부터 내려온 토사물은 하우스 안을 가득 채웠다. 하우스 안에는 케일, 로메인, 치커리 등 각종 쌈 채소가 자라고 있었지만, 모두 폐기될 처지에 놓였다.

김씨는 “올해 농사를 위해 진 빚만 2억원이 넘는데 피해액만 십수억원에 달할 것”이라며 “흙탕물이 하우스를 덮치는 걸 보며 나도 같이 휩쓸려 가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농민들이 바라는 건 무작정 모든 걸 보상해 달라는 게 아니라 살 수 있게만 해달라는 것”이라며 “농수로가 폭우 때마다 무너지지 않도록 시에서 보수 공사를 해줘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씨의 농장에서 일하는 캄보디아인 비쌀씨(34)의 눈물은 지켜보는 이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4년10개월 단위로 갱신되는 비자를 통해 한국에 온 비쌀씨에게 딸은 한 살 때 모습으로 머물러 있다. 그의 딸은 올해 여섯 살이 됐다.

비쌀씨는 “우리 딸 너무 보고 싶어”라며 “일 없어져 너무 속상해. 딸 보러 갈 돈 어떻게 벌어”라며 울먹였다.

건너편 본죽리에 사는 어머니 라혜자씨(75)와 딸 김금숙씨(56) 모녀도 힘이 쭉 빠진 모습으로 체육관 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전날 산양저수지 제방이 무너지면서 쏟아진 ‘수마(水魔)’는 불과 30여분만에 5㎞가량 떨어진 모녀의 마을을 덮쳤다.

어머니 라씨는 “뭔가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나 문을 여니 집앞에 강이 하나 생겼다”며 “차도 없는데 문턱까지 차오른 물을 보며 ‘이제 어쩌나’하며 자포자기 했다”고 회상했다.

3일 오전 이천의 한 농가에서 농장주가 수해로 침식이 심한 도로변을 가리키고 있다. 수해로 2-3m의 절벽이 만들어 졌다.  윤원규기자
3일 오전 이천의 한 농가에서 농장주가 수해로 침식이 심한 도로변을 가리키고 있다. 수해로 2-3m의 절벽이 만들어 졌다. 윤원규기자

꼼짝없이 집에 갇혔던 노부부는 불행 중 다행으로 휴가를 맞아 고향을 찾은 딸 부부를 통해 구조됐다. 그의 집 주변에 토사 유실을 방지하고자 쌓아둔 벽돌과 패널 등은 물길에 휩쓸려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뒤였다.

딸 김씨는 “만일 연로하신 부모님 두 분만 계셨다가 이런 사태가 벌어졌으면 어떻게 됐을지 아찔하다”며 “어제의 물난리에 아직도 가슴이 벌렁거린다”고 했다.

이 밖에 정부와 지자체 인사의 수해현장 방문도 이어졌다. 오후 1시30분께 진영 행정안전부 장관은 산양저수지 붕괴 현장을 찾아 피해 현황을 파악했다. 이어 오후 3시17분께 김희겸 경기도 부지사가 율면실내체육관을 찾아 이재민을 위로했다.

김 부지사는 “소규모 저수지는 안전방지대책이나 재해대응체계가 미약하다”며 “한국농어촌공사와 시ㆍ군으로 나뉘어 있는 현행 관리체계에서 나아가 공조 대응체계를 마련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오전까지 이천에서 침수 피해를 입은 것으로 파악된 주민은 239명이다. 이 가운데 87명은 율면실내체육관, 53명은 율면고등학교 체육관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고 나머지는 친척집 등으로 이동했다.

3일 오전 이천의 한 농가에서 농장주가 수해로 토사가 쓸려간 비닐하우스를 가리키고 있다. 윤원규기자
3일 오전 이천의 한 농가에서 농장주가 수해로 토사가 쓸려간 비닐하우스를 가리키고 있다. 윤원규기자

김정오ㆍ장희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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