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수원시립미술관에서 지난 7일부터 열린 ‘에르빈 부름: 나만 없어 조각’ 전시는 우리나라와 오스트리아의 수교 130주년을 맞아 오스트리아 대표 현대미술작가 에르빈 부름의 작품 세계를 담아냈다. 타이틀 ‘나만 없어 조각’은 ‘조각은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갖고 있다’는 의미를 내포했다. 에르빈 부름은 1980년대부터 조각의 본질과 형식을 탐구해 형태 변화, 부피 증감 등 모든 현상 자체를 조각으로 정의한 작가다. 비만·행위·시간 등 형태가 변하는 모든 것들을 조각으로 재정의 한 그의 시선이 61점의 조각, 사진·영상, 퍼포먼스 작품에 담겨 예술의 상식과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이번 전시는 연도 순이 아닌, 작가가 조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관객이 느낄 수 있도록 구성됐다.
1부 ‘사회에 대한 고찰’에서는 부피를 변형시킨 작품들이 등장한다. 먼저 전시실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작품은 차량의 부피가 풍선처럼 늘어난 ‘팻 컨버터블(팻 카, Fat Car)’이다. 소비에 대한 욕구가 부풀려진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표현한 조각 뒤에 놓인 모니터에선 팻 카가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귀여운 생김새와 달리 굵은 목소리로 무기·마약 등 무거운 주제를 언급해 사회문제를 환기한다.
2부 ‘참여에 대한 고찰’에서는 ‘만지지 마세요’가 아닌 ‘참여하세요’라고 말한다. 특히 에르빈 부름을 다시 작가로 도약하게 한 ‘1분 조각’은 물성뿐만 아니라 시간성도 조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1분 조각’은 ‘동작의 속도를 늦춘다면 조각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아이디어에서 조각의 개념을 확장한 작품이다. 예로 작품 중 하나인 ‘에피쿠로스 태양 아래 빛을 쬐시오’는 천장에 걸린 램프와 받침대, 벽면의 지시 드로잉과 작품 사이에 신체부위를 두고 조각이 돼 보는 관객으로 이뤄진다. 관객이 직접 작품에 손을 대거나 밟아 보는 등 참여자가 조각 자체가 되는 형태를 볼 수 있다.
3부 ‘상식에 대한 고찰’에선 조각에 대한 상식을 깨는 작품을 마주한다. 일반적으로 사진과 평면을 조각이라고 보지 않지만, 납작한 것들도 조각의 양감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관점이 드러난다. 작가가 스스로를 모델로 찍은 ‘사진 조각’에선 예술가가 항상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통념과 정반대인 ‘게으름, 잠, 멍때리기’ 등과 같은 모습을 드러내 관습처럼 이어오는 생각에 대한 의문이 묻어난다. 이어 실제 모델의 옷과 팔·다리 등 표면 일부를 캐스팅한 ‘스킨조각’과 그림을 걸어 둔 ‘평면 조각’은 덩어리가 아닌 껍데기를 조각으로 남겨두며 ‘조각’에 대한 상식의 경계를 허물기도 한다.
“조각은 모든 현상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이자 사회 문제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창구다. 현실적이어야 사람들이 더 많이 접근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복잡한 문제들은 정치로 모두 해결할 수 없으며 예술을 통해서 해결해 나가야 한다”라고 말한 에르빈 부름의 통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전시는 내년 3월19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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