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시대로 가는 길] ‘남북한 통합 한의사 1호’ 김지은 진한의원 원장

“새터민은 ‘통일 한국’ 사회통합의 소중한 씨앗”

“한국의 의사가 생명을 살리는 공부를 했다면 북한의 의사도 생명을 살리는 공부를 했다”

‘남북한 통합 한의사 1호’인 김지은 진한의원 원장(47)은 한국사회가 새터민을 조금 더 평등한 위치에서 바라봐 주길 희망했다.

‘정(情)’ 중에 가장 무서운 정이 ‘밥 정’이라고 했던가. 중국 북경에서 한국 유학생들에게 도시락을 판매하는 일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누나’의 마음이 생겼고 그러한 마음으로 남한에 가보자는 용기가 생겼다는 진 원장.

‘가장 성공한 새터민’으로 첫 손에 꼽히는 진 원장을 크리스마스 이브였던 지난달 24일 진한의원에서 만났다.

진 원장은 “새터민들은 통일 후 사회통합에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며 새터민들에게 “‘견뎌라’ㆍ‘물어보라’ㆍ‘포기하지 마라’는 말을 꼭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 탈북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고향은 함경북도 청진으로 그곳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다. 1990년대 소아과병동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북한은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릴 만큼 어려운 시기로 병원에서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많이 사망했다. 그 상황을 너무도 견디기 어려웠다.

퇴근하면서 ‘내일은 어느 아이의 얼굴을 볼 수 없을까?’라는 생각을 매일 했다. 어쩔 수 없는 질병으로 죽는다면 다소 위안이라도 삼을 텐데 간단한 약만 있으면 살 수 있는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견디기 어려웠던 것 같다. 부모님도 돌아가셔서 ‘이곳을 한번 떠나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 남한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나.

난 80년대에 북한에서 대학교에 다녔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의 물결이 거셀 때였다. 매일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시위하는 모습을 뉴스를 통해 봤다. 그런데 학생과 노동자들이 격렬하게 시위는 하고 있지만 모두 자유롭게 옷을 입고 있었고 손목에 시계도 차고 있었다. 얼굴빛도 굉장히 좋았다. 당시 북한에서는 손목시계는 부의 상징이었다. 그러한 모습이 호기심을 갖게 했다.

특히 북경에서 남한 유학생들을 상대로 도시락 장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학생들은 내가 북한사람이라는 것을 몰랐지만 나는 북한사람으로서 남한 학생들에게 밥을 해 먹이고 밥이 모자란 학생들에게는 밥을 더 주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정성을 쏟고 있더라. 아무렇지도 않은 그냥 동생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때 한국에 가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에 온 것은 2002년이었다. 월드컵을 보면서 한국을 열렬히 응원했던 기억이 난다.

영양실조로 숨지는 아이들 보며 탈북 결심

다단계 빠져 정착금 날리며 힘든 나날 이기고

국감증인ㆍ국회 청원 거처… 국내서 개업 결실

“탈북동포들 지금은 힘들어도, 포기 마세요”

- 남한에서 한의원을 개원하기까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남한에 와서 처음 다단계에 빠졌었다. 너무 멋져 보였다. ‘네트워크 판매’라고 불렀는데 북한에서는 영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네트워크라는 용어도 너무나 멋져 보였다. 하지만 결국 몇 개월 만에 정착금을 모두 날리게 됐다. 내가 할 일이 아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땀을 흘려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한의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직업을 갖기 위해 전단지 등을 보고 전화를 하면 운전이나 컴퓨터 등을 할 줄 몰라 채용되지 못했다.

대부분 가게에서 ‘다시 연락드릴게요’라고 말했는데 난 정말 다시 연락을 주는 줄 알았다. 한국사회에서는 그것이 거절의 표현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1년이 넘게 걸렸다. 당시에는 밤새 전화를 기다렸다. 전화를 기다리면서 ‘왜 남한사람들은 거짓말을 할까?’라는 원망과 미움이 커졌었다.

어떻게 하면 정착을 잘할 수 있을까,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는데 결국 한의학을 하는 것뿐이었다.

이후 교육부에서 한국 한의대 졸업자와 동등한 자격을 얻었지만 자격증 시험은 볼 수 없었다. 복지부에서 북한에서 의사로 활동했던 경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내 사연이 알려져 지난 2004년 국정감사에 증인으로까지 서게 됐다.

감사장에서 국회의원들에게 이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한국에 있는 새터민들과 또 앞으로 통일되면 만나게 될 북한의 지식인들, 그 사람들에 대한 수준을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대비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라고 주장했다.

또 ‘한국의 의사가 생명을 살리는 공부를 했다면 북한의 의사도 생명을 살리는 공부를 했다’고 의원들을 설득했다.

결국 내 의견이 받아들여져 3년 만에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이 개정돼 북한에서의 경력이 한국에서도 인정받게 됐고 개업을 할 수 있었다.

- 남한 사회의 생활은 어떤가. 실망스러운 점도 많을 것 같다.

2009년 개원 후 가장 힘들었던 것은 환자에게 돈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북한은 ‘무상의료’ 체제이기 때문에 환자에게 돈을 받지 않는다.

당시에도 북한식 사고방식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내가 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돈을 어떻게 받지? 난 의료인으로서 의술을 행했을 뿐인데 왜 돈을 받아야 하지?’라는 생각에 스스로 고리대금업자 같고 돈독이 오른 사람 같아 너무 괴로웠다.

그때 한 지인이 다른 사람들한테 돈 받을 때 미안한 생각이 드는 만큼 더 열심히 진료하고 치료해 주면 된다. 그게 ‘자본주의’다 라고 조언을 해줬다.

남한에 온 지 7년이 지나 개원을 한 이후에서야 진짜 자본주의가 이런 것이구나를 깨달은 것이다. 지금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진정으로 최대한 노력해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

남한 사회에 아쉬운 점은 특별히 없다. 다만 탈북자들에게 조금 더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탈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향후 통일이 된 후에 할 일 들을 생각하며 소중하게 대해줬으면 좋겠다.

탈북자들은 북한사람들에게 향후 남한사회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 줄 수 있지 않겠는가. 탈북자들은 통일사회에서 사회가 하나로 뭉치게 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

- 새터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현재 내 휴대폰에는 6천400여개의 전화번호가 있다. 그만큼 이곳에서 많은 사람을 사귀었다. 새터민들도 누구나 노력하면 잘 적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새터민들에게 이런 말을 전하고 싶다. ‘견뎌라!’ 그리고 ‘물어봐라!’.

남한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지 일단 견뎌야 한다. 또 모르면 먼저 다가가서 물어봐야 한다. 그 어떤 남한 사람도 몇 번을 물어보면 모른 척 무시하지 않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 보면 분명히 똑같이 어우러져 함께 갈 수 있다.

또 ‘힘들면 울어라. 그러나 포기하지는 마라’라는 말도 해주고 싶다. 어차피 종착점은 한 곳이니까 포기하지 말고 천천히 길게 가자는 말을 꼭 해주고 싶다.

- 마지막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그저 한의원을 찾아오는 손님들이 편안한 마음을 느꼈으면 좋겠다. 나는 항상 웃고 있는 한의원 선생님으로 기억됐으면 좋겠다.

이호준기자 hojun@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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