未忘 혹은 備忘 1 -최승자 아무도 모르리라. 그 세월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아무도 말하지 않으리라. 그 세월의 내막을. 세월은 내게 뭉텅뭉텅 똥덩이나 던져주면서 똥이나 먹고 살라면서 세월은 마구잡이로 그냥, 내 앞에서 내 뒤에서 내 정신과 육체의 한가운데서, 저 불변의 세월은 흘러가지도 못하는 저 세월은 내게 똥이나 먹이면서 나를 무자비하게 그냥 살려두면서. 《내 무덤, 푸르고》/문학과지성사/1993 익숙한 것은 편하다. 오래 입은 옷이 그렇고, 늘 보던 사람의 미소가 그렇다. 편한 것들은 넉넉하고 여유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익숙한 것에 늘상 끌린다. 그렇지만 그 끝에는 권태가 기다린다. 지옥의 삶보다 견디기 힘든 것이 권태의 시간일 것이다. 삶이 시들하고 재미없는 이유는 바로 익숙한 것에 두 발을 담그고 있기 때문이다.사람들은 시가 아름다운 것들의 결정(結晶)이라고 생각한다. 반은 맞지만 반은 어긋난 생각이다. 세상이 늘 아름다워야만 한다는 믿음이나 기대는 순진한 도식 관념이다. 낯설고, 불편하고, 추(醜)한 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삶은 허약하다. 낯설고 추한 것들은 배척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들여다봐야 할 내면의 얼굴들이다. 시의 또 다른 역할은 추한 것들의 이름을 적극 호명해서 익숙함과 편함으로 길들여진 감정과 의식을 갱신시키는 것이다. 최승자의 未忘 혹은 備忘 1은 당혹스럽고 충격적이다. 우선은, ‘똥’이라는 단어가 시종 심사를 불편하게 한다. 그 불편함은 똥에 대해 품고 있는 나의 위생학적이고 문화적인 선입견을 사정없이 추궁한다. 추궁의 요체는 “너는 삶의 고통에 대해 솔직하니?”라는 물음이자 따짐일 것이다. “뭉텅뭉텅 똥덩이나 던져주면서” 자신을 “무자비하게 그냥 살려두면서” 흘러가는, 아니 흘러가지 못하는 어떤 세월에 대해 최승자는 낮고 서늘하게 절규한다. 그 서늘함은 그 누구도 모르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 “그 세월의 내막”과 관련된 애증의 깊이일 것이다.그러한 문맥에서 ‘똥’은 분명 ‘무엇’에 대한 증오의 표징이며, 모멸의 시간을 견뎌가는 자신의 삶을 낯설게 환기하는 매개물이다. 자신의 온 삶을 붙들어 매는 ‘불변의 세월’과 ‘그 세월의 내막’에 얽힌 고통에 대해 나는 공감도 짐작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삶이 고통으로 깊어질 수 있고, 애증으로 심오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체감하게 된다. 그래서 이 시는 당혹과 충격을 넘어서서 묵직하고 울컥한 울림을 준다. 예술이 심오한 것은 애증 때문이라는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말을 떠올려본다. 예술만이 아니라 삶도 그러하리라.신종호 시인
문화
신종호
2017-09-26 19: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