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며 읽는 동시] 숙제 끝

숙제 끝 김재수 탈곡을 마친 벼들이 논바닥을 베고 편히 누웠다 열매를 거둔 과일나무와 이파리 무성하던 나무들도 모두 내려놓으니 어깨가 가볍다 숙제 끝 하고 외치며 두 팔 높이 쳐들던 나랑 똑 같아 보인다. 끝이 없는 인생의 숙제 학교 다녔을 때 숙제는 늘 마음의 짐이었다. 허나 숙제를 마치고 나면 그리 시원할 수 없었다. 마치 목욕을 하고난 뒤끝처럼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해서 난 언제나 숙제부터하고 놀았다. 이 동시를 보았을 때 맨 먼저 떠오른 게 어린 날의 추억이다. 탈곡을 마친 벼, 열매를 거둔 과일나무, 이파리 내려놓은 나무들의 저 모습을 시인은 숙제마친 아이로 보았다. 그 시안이 놀랍다. 그런데 나이 들어보니 숙제는 학생들에게만 있는 게 아니란 생각이다. 인생에도 숙제가 있다는 것. 이런 늦가을이면 어김없이 ‘숙제’를 생각하게 된다. 난 숙제를 얼만큼 했는가? 아니, 했다고 하더라도 정성들여 했는가? 아니면 얼렁뚱땅했는가? 숙제 다음날엔 선생님의 숙제 검사를 받아야 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숙제를 일일이 검사한 뒤 잘한 아이에겐 칭찬을, 못한 아이에겐 회초리를 내렸다.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다 보니 숙제 검사 받을 일이 걱정된다. 마치 월요일 등교를 앞둔 일요일 저녁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없다. 숙제를 마치고 두 팔을 높이 쳐든 시 속의 아이가 자꾸 부럽기만 하다. 내가 아는 김재수 시인은 매일 한 편씩 동시를 써내는 열정을 지닌 작가다. 세월 속에서도 늙지 않는 청년 작가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나뭇잎 수채화

나뭇잎 수채화 김경은 나뭇잎 주워다가 무지개 물감 칠하여서 튼튼하고 예쁜 집 지어봐야지 오동잎은 두 개 붙여 빨간 지붕 만들고 도라지 보라꽃은 커튼으로 달까 봐 단풍잎 빨갛게 내 동생 볼에 찍어 오늘 밤 찾아올 예쁜 달에게 멋진 우리 집 자랑해야지. 가을이 만든 ‘우리 집’ 집짓기처럼 즐거운 놀이도 없다. 우린 누구나 어린 시절에 수많은 집을 지으며 즐거워했다. 모래집도 짓고, 흙집도 짓고, 나뭇잎집도 지었다. 그러면서 꿈을 키웠다. 그때의 집은 단순한 집이 아니라 세계요, 우주였다. 이 동시는 제목 그대로 나뭇잎으로 집을 짓는 이야기다. 오동잎, 도라지꽃, 단풍잎 등이 재료다. 재료치곤 무상으로 얻을 수 있는 고마운 것들이다. 가을이면 세상천지에 널려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곧 신이 주신 선물이다. ‘오늘 밤 찾아올 예쁜 달에게/멋진 우리 집 자랑해야지.’ 집들이 손님으로 달을 선택했다는 것도 퍽 재미있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내 집이 아니라 ‘우리 집’이다. 이는 시인만이 아니라 우리 국민은 ‘우리’란 복수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 우리는 나란 단수 대신 복수를 즐겨 쓰는 것일까? 우리 동네, 우리 아파트, 우리나라. 이는 오래전부터 공동체 생활을 해온 우리 국민의 유전자 대물림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린 그렇게 살았다. 어릴 적부터 소꿉놀이를 하면서.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란 울타리가 허술해지다 못해 구멍이 숭숭 뚫리고 있다. 이 안타까운 마음을 시인은 동시란 이름을 빌려 넌지시 꼬집고 있지 않나 싶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가을비

가을비 원순자 어젯밤 산들산들 바람 불더니 산기슭 따라서 가랑비가 옵니다 가을비는 떡비라고 할머니가 부침개를 부칩니다 부엌에서 살금살금 고소한 냄새가 기어 나옵니다 앞마당의 홍시도 침을 꿀꺽 삼킵니다 맛있는 추억 머금은 가을비 같은 비라도 어느 때 오느냐에 따라서 이름이 다르다. 가을비는 떡을 해먹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시인은 할머니와 부침개를 연결 지어 가을비를 묘사했다. 부엌이란 어휘를 사용한 걸 보니 가난했던 시절인 것 같다. ‘고소한 부침개 냄새가 부엌에서 살금살금 기어 나온다’는 구절이 퍽 재미있다. 여기에 맨 끝 연이 또한 맛소금 맛이다. ‘앞마당의 홍시도/침을 꿀꺽 삼킵니다’ 고소한 냄새에다 먹고 싶은 군침에 앞마당의 홍시까지도 침을 삼킨다는 요 구절이야말로 백미 중에 백미다. 이런 시는 어린이보다는 어른들이 읽어야 더 좋을 듯싶다. 가슴 저 안쪽에 잠자고 있는 동심을 깨울 수 있는 자명종 역할을 이런 동시가 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어느 시낭송 자리에서 있었던 인상 깊은 장면이 생각난다. 한 출연자는 시가 아닌 동시를 들고 나와서 더 많은 박수를 받았다. ‘티브이를 끌 때는 리모컨이 아니고/용기로 끈다는 선생님의 말씀에/“아니오,”/시후가 외쳤다/“우리 아빤 발로 꺼요!”-티브이 끄기(강수성). 이 얼마나 귀여운가! 이런 것이 곧 동시만의 매력이다. 원순자 시인의 「가을비」도 이에 못잖은 흥미와 맛을 지니고 있다. 낭송으로 듣는다면 더 좋을 듯싶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가을 산

가을 산 김순천 누가 그리던 그림이었을까 봄내 여름내 산자락으로 초록 물감을 실어 나르더니 언제부터인가 오색 물감을 덧칠하다가 멈추었다 이유가 뭘까 그 곱던 빛깔이 어느 사이 선들바람에 서걱대며 나붓나붓 떨어지고 있는데 겸손의 계절 '가을' 가을은 눈으로부터 감지된다. 이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게 산이다. 봄부터 시작한 초록 세상이 여름을 정점으로 기활 좋던 빛깔을 잃고 서서히 엷어지고 있다. 이를 제일 먼저 감지하는 건 언제나 시인이다. 그의 촉감은 가히 프로급이어서 한 번도 남에게 뒤쳐져 본 적이 없다. 이 동시는 그림을 내세운 가을 이야기다. 화가의 그림으로 계절을 풀어내고 있다. 화가는 초록 물감으로 봄을 칠하고 이내 여름을 칠한다. 그럴수록 초록은 초록에서만 머물지 않고 오색빛깔로 번져나간다. 화가는 신바람이 났다. 자신의 손에서 온 세상이 황홀한 빛깔로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화가는 안타깝게도 거기서 손을 멈춰야만 했다. 더 이상 붓질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시인은 계절을 통해 넌지시 우리네 삶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맞다! 인생도 젊음의 정점을 맞이하면 그때부터는 서서히 늙음을 향해 하향 곡선을 긋지 않으면 안 된다. 가을은 삶을 돌아다보는 시간이다. 나는 어떻게 살았는가. 어떤 빛깔로 생을 칠해 왔는가. 자신의 화판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리고 손을 떼기 전에 어느 곳에 더 붓질을 해야 할까도 생각해야 한다. 가을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드는 참 고마운 계절이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두부

두부 이준관 두부를 사러갔다 아파서 누워 계신 아빠가 좋아하는 두부 -오, 두부를 사러 왔구나 -네 마트에서 두부를 사 갖고 오는 길 하늘에 떠 있는 두부만 한 달도 함께 갖고 왔다 아빠 방도 환해지라고 아빠를 생각하는 예쁜 마음 심부름에는 두 가지의 종류가 있다. 마음이 내켜서 하는 즐거운 심부름이 있는가 하면, 어른이 시키니까 마지못해 하는 심통난 심부름이 그것이다. 이 동시 속의 아이는 어떤 심부름을 한 것일까? 아빠를 생각하는 아이의 마음이 달처럼 둥글다. 두부를 좋아하는 아빠를 생각하며 마트로 달려가는 아이. 두부를 사가지고 집으로 가는 아이. 그런데 아이는 그냥 가지 않고 밤하늘에 떠 있는 둥근 달까지 들고 간다. 무엇 때문에? 아빠 방이 환해지라고. 아니, 아빠의 병이 얼른 나으시라고. 효를 이보다 더 훌륭히 그리고 아름답게 설명할 수 있는 게 또 어디 있을까?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두부와 함께 갖고 간다는 이 구절이야말로 시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표현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아이들입니다. 자연이 아름답지만 아이들만큼 아름다울까요. 나는 그런 아이들이 있는 곳에 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준관 시인은 시와 동시를 두루 쓰는 두 날개 시인이다. 이번에 펴낸 동시집 『얘들아, 우리 아파트에 놀러 와』에는 이처럼 맑고 반짝이는 동심의 씨앗이 가득 담겨 있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들풀

들풀 박상재 바람은 산보다 들을 좋아한다. 산 그늘에 갇힌 꽃보다 벌판에서 흔들리며 크는 들꽃을 더 좋아한다. 바람은 들꽃보다 들풀을 좋아한다. 물그림자에 비친 제 모습 훔쳐보는 들꽃보다 짓밟혀 쓰러져도 스스로 일어나는 들풀을 더 좋아한다. 나도 향기 진한 들꽃보다 바람에 부대끼는 들풀이 더 좋다. 질긴 생명력 풀처럼 잘 자라는 식물도 없지 싶다. 가꾸지 않아도 제 스스로 자라는 게 풀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로부터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따가운 눈총을 받기도 한다. 퇴직과 함께 귀농한 내 친구 J는 여름 내내 풀과의 전쟁으로 손이 엉망이 됐다며 전화를 하기도 했다. 하루라도 풀을 뽑지 않으면 온 집안이 풀밭이 된다며 이렇게 무자비한 식물이 어딨냐고 한다. 하지만 만약에 풀이 없다고 생각해 보라. 이 세상이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저 너르고 너른 들판(세상)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동시 ‘들풀’은 그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는 빼어난 작품이다. ‘향기 진한 들꽃보다 바람에 부대끼는’ 들풀이 더 좋다고 노래한다. ‘짓밟혀 쓰러져도 스스로 일어나는’ 들풀의 질긴 생명력을 노래한다. 들풀의 의미는 여기서만 그치는 게 아니다. 들풀이야말로 온 세상의 ‘배경’이 되어준다는 것! 묵묵히 조연을 자처함으로써 꽃과 나무, 나아가 저 파란 하늘의 존재를 더욱 빛나게 해준다는데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렇게 생각하면 가꾸지 않아도 억척스럽게 생명을 이어가는 들풀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모르겠다. 이 ‘들풀’은 노래로도 불리어져 더욱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엄마 품에 안겨 행복한 꿈나라로

꿈나라 최지훈 꿈나라는 엄마 품 일등석에 안겨서 가는 나라 꿈나라는 토닥토닥 엄마 손바닥 소리 들으며 가는 나라 엄마 품에 안겨 행복한 꿈나라로 아기가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제라고 보시는가? 아기한테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엄마 품에 안겨서 잠잘 때가 아닌가 싶다. 엄마 또한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제라고 보시는가? 아기가 방긋방긋 웃을 때도 행복하겠지만 엄마 품에 안겨서 새근새근 잠잘 때가 아닌가 싶다. 이 동시는 더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읽는 것으로 누구나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단순, 명료, 감동을 한꺼번에 주는 작품이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는 심장의 고동 소리를 서로가 듣는 거리가 아닌가 싶다. 그 좋은 본보기가 엄마와 아기 사이. 곧 아기의 심장과 엄마의 심장이 맞닿은 거리다. 이보다 더 가까운 거리는 없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도 아기를 안은 엄마 풍경이다. 그리고 또 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도 엄마가 아기를 안았을 때다. 이때는 세상의 그 어떤 걱정이나 근심도 끼어들 틈이 없는 것이다. 이 동시는 엄마 품에 안긴 아기가 꿈속에서 찾아가는 나라를 담았다. ‘엄마 손바닥 소리 들으며 가는 나라’라는 표현이 퍽 재미있다. ‘토닥토닥’이 주는 음악성이 읽는 이의 청각에 시의 경쾌함을 선사한다. 활자도 때론 음표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라 하겠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할머니의 올곧은 사랑

텃밭할매 최균희 이른 아침부터 해질 녘까지 텃밭에 앉아서 잡초 뽑는 할머니. 주름살 얼굴에 허리는 휘었어도 손자손녀 사랑은 하늘만큼 땅만큼 정성을 가득 담아 바리바리 싼 보따리 할머니 두 손등은 고목나무 껍질 같다. 할머니의 올곧은 사랑 호미는 할머니의 굽은 등을 본떠 만들었지 싶다. 집안 살림에다 자질구레한 농사일까지 새벽부터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한 생이 저물어버린, 등이 굽은 할머니를 꼭 닮은 저 호미! 그런 생각을 하며 이 동시를 읽었다. 이 작품의 할머니도 이른 아침부터 해질 녘까지 텃밭에서 산다. 자고 나면 몰라보게 자라는 잡초를 뽑느라 하루해가 모자란다. 그러다 보니 손은 고목나무 껍질이 됐다. 그럼에도 주름진 얼굴은 밝기만 하다. 텃밭에서 나는 먹거리를 도시에 사는 손자손녀에게 보낼 꿈이 있기 때문이다. ‘주름살 얼굴에/허리는 휘었어도/손자손녀 사랑은/하늘만큼 땅만큼’. 맞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것이 사랑이란 묘약이다. 필자의 동화 가운데 ‘나쁜 엄마’란 작품이 있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빠를 대신해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느라 제대로 엄마 노릇을 못하는 엄마를 나쁜 엄마라고 생각한 난희가 한밤중 헌 옷을 깁는 엄마의 고목나무 껍질 같은 손을 보고 그제야 엄마의 깊은 사랑을 깨닫는다는 동화다. 이 동시는 오히려 고목나무 껍질 같은 손으로 손자손녀의 선물을 장만하는 꿈을 담고 있다. 어쨌거나 사랑은 아름다운 것, 세상의 빛이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여름

여름 김영주 교실이 너무 더워 야외수업을 나왔다 김하늘 네- 한가람 네- 출석을 부르는데 자기는 나무 위에 있다고 참매미가 네엠- 넴- 쩌렁쩌렁 매미 출석 가난했던 시절. 있는 사람은 몰라도 없는 사람은 여름나기가 만만치 않았다. 전기료 걱정에 선풍기조차도 맘 놓고 틀 수가 없었다. 학교라고 예외일리 없었다. 빠듯한 운영비를 축내지 않으려면 더위쯤은 견뎌야 했다. 생각다 못해 야외수업을 나선 모양이다. 학생들에겐 신나는 수업이다. 따분한 교실수업에선 맛볼 수 없는 자연공부시간이니 말이다. 출석부 호명에 대답하는 목소리부터가 쩌렁쩌렁하다. 그런데 여기에 웬 또 다른 학생이 끼어들었다. 바로 매미란 녀석이다. 자기 이름을 부르지 않았는데도 한사코 ‘네엠-넴-’ 대답한다. 이 동시는 그래서 읽는 이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자연교실, 그렇다! 자연교실이 아니면 보여줄 수 없는 진풍경을 시인은 요렇게나 재미있게 펼쳐 보였다. 한 편의 시를 읽고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은 그 무엇에 비할 수 없는 삶의 기쁨이다. 돈 한 푼 안 들이고 이만한 기쁨을 어디 가서 얻을 것인가. 바캉스 가방에 꼭 넣어야 할 것으로 시집이나 동시집을 추천하고 싶다. 시원한 파라솔 밑이나 나무 그늘에 앉아서 시 한 편을 읽는 즐거움을 어디에 비하랴. 몸의 더위뿐 아니라 마음의 더위까지도 말끔히 씻어줄 것이다. 여기에 아름다운 추억 하나는 덤일 것이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글쎄다

글쎄다 김재수 맛있게 밥 먹는 나를 보고 할아버지는 내 배가 부르다 한다 마른 논 물꼬에 콸콸 물 들어가는 걸 보시고 또 내 배가 부르다 한다 물은 마른 논에 들어가는데 왜 할아버지 배가 불러요? 허허 글쎄다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부르다 할아버지는 참 이상한 분이다. 밥 먹는 나를 보시고는 할아버지의 배가 부르다고 하신다. 어디 그 뿐인가? 마른 논에 물 들어가는 걸 보시고도 할아버지의 배가 부르다고 하신다. 할아버지의 배는 도대체 어떻게 된 배일까? 아이는 궁금한 나머지 할아버지한테 묻는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대답 대신 웃기만 하신다.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 갸우뚱한다. 세월이 흘러 아이가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된 아이는 그제야 할아버지의 말뜻을 알아차린다. 이 동시를 보았을 때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니는 내가 밥 한 그릇을 비우면 그리 좋아하셨다. 배가 부르다고 말씀을 하시진 않았지만 그 이상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효도란 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밥 한 그릇 잘 비워내는 것! 그게 바로 자라는 아이들의 효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외아들인 나는 부모님에게 걱정을 많이 끼쳐드린 불효자식이다. 사흘돌이로 아팠고, 걸핏하면 결석이었다. 내가 가장 받고 싶었던 상장은 우등상이 아니라 개근상이었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그 상을 받지 못한 채 초·중·고를 졸업했다. 시대가 바뀌었어도 밥 한 그릇은 여전히 부모님에게 효도다. 부모님의 배는 자식의 밥 한 그릇이면 그만인 것이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이상한 일기예보

이상한 일기예보 김애숙 짝꿍과 싸운 우주 마음은 구름 끼어 흐림이구요 친한 친구 전학 간 초롱이 마음은 온종일 비내림이에요 은별이와 사이좋게 도시락 나눠 먹은 상구 마음은 해가 쨍쨍 맑음이지요 그런데 낮에는 언제나 해가 떠있대요 아이들 마음이 곧 날씨 일기와 마음을 하나로 연결 지은 재미난 동시다. 밝은 해가 떠 있는 훤한 대낮인데도 아이들의 마음은 구름 낀 날일 수도 있고, 비가 내리는 날일 수도 있다. 그게 아이들, 아니 사람의 마음이요 기분이다. 시인은 짝꿍과 싸운 우주의 마음, 친구를 전학 보낸 초롱이 마음, 은별이와 도시락을 나눠 먹은 상구 마음을 통해서 이를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 사람은 기분에 따라서 밖의 일기까지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다. 고교 시절 얘기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다 늦은 저녁에 H가 헐레벌떡, 그것도 비를 흠뻑 맞은 채로 찾아왔다. 깜짝 놀라 물었더니 자기가 좋아하는 여학생한테서 마침내 답장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한테 이 기쁜 소식을 빨리 알리려고 우산도 쓰지 않고 달려왔다는 것. 물에 빠진 생쥐의 모습을 한 친구는 더없이 행복한 얼굴이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이면 종종 그 친구 생각이 나곤 한다. 사람의 기분은 그런 것이다. 아이들의 마음이야 오죽할까. 아동문학을 흔히 어린이문학이라고 한다. 이는 어린이의 마음 곧 동심이 없이는 쓸 수 없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성인시를 쓰는 사람들도 동시를 얕잡아 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마지막 가족사진

마지막 가족사진 최영재 1950년 1월 1일 아버지는 두 아들을 끌어안고 엄마는 9개월 된 딸 품에 안고 싱긋 웃으신다 단란한 둥지 일곱 달 뒤 터질 시한 폭탄이 우리 집에 장착되어 있는 줄도 모르고 부모님은 저렇게 웃기만 하신다 째깍 째깍 째깍 아프지만 소중한 보물 어느 집이고 간에 가족사진 한두 장씩은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들여다보고 싶은 사진은 가족사진이 아닐까 싶다. 온 가족이 모여 앉은 그 사진만큼 눈길을 끄는 사진도 없으리라. 헌데 들여다보면 볼수록 가슴 아픈 사진도 있게 마련. 최영재 시인은 6.25 직전에 찍은 가족사진을 지금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북한군에 의해 북으로 끌려가신 아버지를 회상하게 하는 가슴 아픈 가족사진이다. 시인의 부친 최영수 옹은 당시 경향신문 출판국장으로 소설가, 수필가, 만화가, 영화인으로 이름을 날리셨던 분. 납북 도중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혀 주동자로 처형당하셨다. 최신인의 가슴엔 그 아픈 기억이 대못처럼 박혀 있는 것이다. 이 동시는 그래서 ‘눈물의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어찌 최시인 한 사람의 사진뿐이겠는가. 전쟁 중에 북으로 끌려간 수없는 이들의 가족사진도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 오늘의 자유와 평화가 있기까지 이를 지키기 위해 목숨 바친 분들을 기억하고 그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해야 하는 달이다. 상처는 낫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 법. 가끔은 덧을 내야만 잊지 않는다. 최시인의 마지막 가족사진이 이를 말하고 있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까치집

까치집 유응교 높다란 나무 위에 사뿐히 지어진 집 태풍이 불어와도 그대로 끄떡없네 목수도 저리 튼튼히 지을 수는 없을걸 너그러움·여유 속 튼튼해지는 관계 까치들은 왜 집을 공중에 지을까? 어렸을 적 하도 궁금해 선생님께 여쭤봤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빙긋이 웃으시더니 이렇게 대답해 주셨다. 세상 구경을 하고 싶어서 높은 곳에다 짓는다고.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가 또 질문했다. “선생님, 까치집은 태풍에도 날아가지 않아요” 그러자 선생님은 또 이렇게 대답해 주셨다. “까치들의 조상은 원래 목수였단다.” 이 동시조를 읽으면서 어린 날의 추억을 되새겨 봤다. 맞다! 태풍이 불어와도 끄떡없는 게 까치집이다. 사람들이 지은 집은 무너질지언정 엉성해 보이는 까치집이 무너졌다는 뉴스는 들어본 적이 없다. 시인은 그 엉성해 보이는 까치집에 시선을 줬고, 이를 독자들에게 주목하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까치집이 엉성하지 않다면 태풍 같은 센 바람에 통째로 날아가 버릴 것이다. 엉성한 덕분에 바람이 빠져나갈 틈새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비쩍 마른 나뭇가지와 진흙 한 덩이로 짓는 저 까치집! 그건 그 어느 가옥보다도 튼튼한 성채가 되는 것이다. 인간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너그러움과 여유를 지녔을 때 인간관계가 원만해지는 법. 시인이 까치집을 통해 얘기하고자 한 것도 여기에 있지 싶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길고양이

길고양이 김경은 할머니 시골집에 길고양이 가족 살아요 낮에는 해님 피해 평상 밑에 숨었다가 별님이 찾아오면 달리기 경주해요 작은 바람 소리에도 꾸르륵 꾸르륵! 있는 힘 다해서 가족을 지켜요 온정 가득한 ‘할머니 집’ 길고양이는 길에서 사는 고양이다. 그러니까 길이 집이다. 왜 길에다 집을 마련했을까? 이 동시는 길에서 떠돌던 고양이가 시골 할머니 집에 와서 사는 이야기를 담았다. 여기서 독자들은 할머니의 따듯한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길고양이네 가족이 정 붙이고 살 만한 할머니 집을 찾아낸 끝에 보금자리를 틀었을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낮에는 해님 피해/평상 밑에 숨었다가/별님이 찾아오면/달리기 경주해요’. 고양이의 일상을 보여주는 이 대목이 숨어 지내는 길고양이의 슬픔을 말해준다. 그와 함께 이런 길고양이를 숨겨주는 할머니의 마음도 짐작하게 해준다. ‘작은 바람 소리에도/꾸르륵 꾸르륵!/있는 힘 다해서/가족을 지켜요’. 가족을 지키고자 하는 것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같다고 본다. 할머니는 길고양이의 이런 아름다운 가족애를 지켜보다가 길고양이네 가족에게 전세니, 월세니 그런 것 따지지 않고 무상으로 집을 내줬을 것이다. 사는 날까지 맘 편하게 살라는 당부와 함께. 한 세상을 함께 사는 것! 그건 인간뿐 아니라 동물과도 그리고 저 푸른 자연과도 같은 얘기가 되는 거 아니겠는가. 시인은 시와 시조를 넘나드는 것도 부족해 얼마 전부터는 시 낭송가로도 이름을 떨치고 있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져 줍니다

져 줍니다 손동연 해가 집니다. 아니, 져 줍니다. 그래야 달이 돋거든요. 별들도 또랑또랑 눈 뜨거든요. 기다림의 미학 ‘어린이가 좋아서/동시를 씁니다./동시가 좋아서/어린이로 삽니다.’ 이는 50년을 동시 하나만 써온 손동연 시인의 인생철학이다. 그는 정말이지 어린이가 되고 싶어서 처음부터 동시를 썼고, 결혼식도 어린이날에 했다. 이쯤 되면 진짜 ‘어린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이 동시다. 그는 해가 지는 것을 ‘져 준다.’고 보았다. 이런 생각을 과연 어른이 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다 져 주는 까닭도 또렷이 밝혔다. 달을 돋게 하기 위해서 져 주는 거라고 했다. 어디 그뿐인가? 별들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져 주는 거라고 했다. 남을 위해 뭔가 해준다는 것! 그것처럼 아름다운 것도 없으리라. 시인은 이를 저 하늘의 해를 통해서 ‘또랑또랑’ 말하고 있는 것이다. 5월은 어린이날이 있는 달이다. 한국문인협회 아동문학분과(홍성훈 회장)에서는 5월1일을 기해서 5개의 아동문학단체와 함께 제22회 ‘아동문학의 날’ 기념식을 갖는다. ‘어린이 사랑의 마음으로 동심이 넘치는 아름다운 세상을 가꾸자’는 귀한 뜻이 담긴 의미 있는 행사다. 바라건대, 이 아름다운 행사가 우리 사회의 정풍(整風) 운동으로 확산되어 어린이들이 보다 밝고 힘차게 자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엉덩이가 불쑥

엉덩이가 불쑥 김흥제 누워있던 아가 어느 결에 획 뒤집었다. 고개 번쩍 들고 둘레둘레 보다가, 두 손에 힘주고 고개를 더 번쩍. 그러다, 머리 숙이더니 엉덩이가 불쑥 하늘로 솟았다. 두 다리로 힘주지만 아직은, 배밀이만 한다. 아기 몸짓·손짓에도 행복 가득 인간이 두 발로 선다는 것! 그것처럼 위대한 일도 없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 데에는 바로 ‘직립’의 자세를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동시는 아기가 제 힘으로 일어서려는 안간힘의 동작을 담았다. ‘고개를 번쩍 들고/둘레둘레 보다가,/두 손에 힘주고/고개를 더 번쩍’. 한마디로 귀엽다. 아기의 저 안간힘이 읽는 이를 미소 짓게 한다. 자식을 길러본 엄마 들은 이를 잘 보았을 것이다. 제 홀로 일어서기가 쉽지 않다는 것! ‘그러다, 머리 숙이더니/엉덩이가 불쑥/하늘로 솟았다.//두 다리로 힘주지만/아직은, 배밀이만 한다.’ 아기의 배밀이 동작은 그렇게 새롭고 신기하기만 하다. 엄마들은 이를 지켜보며 거기서 삶의 행복을 느낄 것이다. 비록 가난한 살림일지라도, 설혹 걱정거리가 있을지라도. 집사람은 지금도 아이들 키울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한다. 흐릿한 흑백사진을 들여다보며 종종 미소를 짓는 것을 본다. 맞다! 아이들의 자라는 모습 하나하나가 온 집안의 웃음이었고 행복이었으니까. 언제부턴가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하는 게 아이의 울음소리다. 그러니 인구 감소는 너무도 당연한 일.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이웃의 아기 배밀이 소식이 자못 기다려진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목련

목련 김명숙 봄비에 목련꽃 눈 떴다. 땅거미 내리는 골목에 하얗게 하얗게 목련꽃등 달았다. 우산도 없이 회사에 간 아빠 돌아오실 골목 어귀에 우산 들고 기다리는 나처럼 꽃등 환히 밝히고 서서 아빠를 기다리고 있다. 목련은 볼수록 귀하고 탐스럽다. 부잣집 도련님 같다고나 할까. 어느 한 군데 모자람이 없어 보이는 넉넉한 꽃이다. 김명숙 시인은 봄비 속의 아빠를 기다리는 아이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다. ‘봄비에/목련꽃 눈 떴다’. 목련꽃을 깨운 건 봄비였다고 첫 연을 시작한다. 그런데 목련에게는 반가운 봄비지만 나에겐 걱정도 하게 하는 봄비다. 왜냐하면, 우산도 없이 회사에 간 아빠 때문이다. 그래서 우산을 들고 골목 어귀로 나가 아빠를 기다린다. 그런데 아빠를 기다리는 건 나 혼자만이 아니다. 목련도 꽃등을 환히 밝히고 아빠를 기다린다. 이 동시의 매력이다. 시인이 사물을 보는 눈이 매서우면서도 따듯하다. 기다림은 인생살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삶의 과정 중 하나다. 우린 일생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기다림을 반복하고 있는가. 어릴 적 서울 이모 집에 다니러간 엄마를 하룻밤 내내 울면서 뜬눈으로 지새운 경험을 필자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이 동시는 아빠를 기다리는 아이의 마음을 통해서 누군가를 기다려 본 우리 모두의 심정을 돌아보게 한다. 때는 바야흐로 목련꽃이 한창이다. 여러분 중에도 목련꽃 그늘 아래서 누구를 기다려본 경험이 있으실 것이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지하철

지하철 김옥애 땅 아래 어두운 길을 달리는 기차 지하철 창문에 군데군데 시가 써져 있다. 글과 글을 쓴 사람의 이름이 써져 있다. 기차도 시를 읽으면서 달린다. 소박한 詩의 매력 기차도 시를 읽으면서 달린다. 시를 만나는 일은 즐겁다. 강을 끼고 도는 산책길에서, 등산 입구에서, 시민공원에서, 지하철역에서 만나는 시도 그 중 하나다. 잠시 전동차를 기다리는 동안 만나게 되는 시 한 편. 길지 않아서 좋고, 어렵지 않아서 좋은 시 한 편. 어린이도 할머니도 함께 읽고 즐길 수 있는 시 한 편. 이는 그 어느 책 한 권 분량의 독서량을 능가할 수도 있다. 시인은 바로 지하철역에서 만나는 소위 ‘스크린 시’를 작품화했다. 본대로 그냥 적었다. 그 어떤 수식도, 치장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맛이 난다. 맨 마지막 구절 덕분이다. ‘기차도 시를 읽으면서 달린다.’ 이 구절이 없었다면 굳이 여기에 소개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시는 이래야 한다. 편하게 읽다가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그 뭔가를 지녀야 한다. 특히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동시라면 더더욱 그렇다. 시를 읽으며 달리는 기차는 얼마나 멋질까? 아니, 향기로울까? 아니아니, 그 기차를 타고 가는 승객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시인은 동시뿐 아니라 동화작가로도 이미 일가를 이룬 원로작가다. 그동안 장편동화 9권, 단편동화집 8권을 펴낸 바 있다. 지금은 강진군 중저 마을 바닷가에서 오로지 작품을 쓰며 멋진 인생 후반부를 즐기고 있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이름 스티커

이름 스티커 노은희 반짝반짝 엄마 화장대 위 살짝 붙인 이름 스티커 척척박사 아빠 컴퓨터 뒤 몰래 붙인 이름 스티커 귀여운 동생 짱구 이마에도 꾸욱 눌러 붙인 이름 스티커 모두 다 내꺼! 밉지 않은 욕심쟁이 아이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다 갖고 싶다. 그게 아이들의 마음이다. 소유욕! 그렇다고 그 소유욕이 어른들의 소유욕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아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순수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 동시는 그런 맑은 소유욕을 보여준다. 엄마의 화장대, 아빠의 컴퓨터에 제 이름 스티커를 몰래 붙여 놓고 좋아한다. 거기서만 멈추지 않고 동생의 이마에도 제 이름 스티커를 꾸욱 눌러 붙였다. 장난기도 보통 장난기가 아니다. 하지만 밉지 않다. 그러니 나무랄 수는 더더욱 없다. ‘모두 다 내꺼!’. 제 이름 스티커를 붙여 놓고 만세를 부르는 아이의 모습이 왜 그리도 귀엽고 어여쁜가. 아이는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기분일 것이다. 어릴 적 이웃에서 함께 뛰놀던 대성이란 친구 생각이 난다. 대성이는 뒷산의 소나무 가운데서 가장 멋들어지게 생긴 소나무에다 제 이름 석자를 붙여 놓고 좋아했다. 자기 소나무라는 것이다. 소나무만이 아니었다. 저녁에 제일 먼저 밤하늘에 나오는 별을 자기 별이라고 우겼다. 심지어 하나뿐인 달도 자기 달이니 함부로 쳐다보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별명이 ‘못 말리는 욕심쟁이’였다. 그 대성이도 살아 있다면 나처럼 80줄의 늙은이가 됐을 것이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생각하며 읽는 동시] 억울함

억울함 정두리 우리 식구들은 내가 걸핏하면 울고 떼쓴다고 한다 치, 아니다 툭하면 아무 때고 그러는 거 아니거든 내 말 무시하면 그러는 거지 지금처럼 그렇게 말하면 정말 울게 된다고 부끄럽고 억울해서 그러는 거잖아. 아이를 존중하며 대우하자 아이가 울 적엔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다. 몸이 아파서 울거나, 배가 고파서 우는 경우는 말 못 할 아기일 때지만 조금 커서 운다면 여러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 동시는 자기를 무시하는 데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 우리 가정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네가 뭘 알아?”, “어른들 얘기하는데 왜 끼어드니?”, “넌 어려서 아무것도 몰라.” 등등. 무시당하는 일처럼 억울한 게 어디 또 있을까. 아이의 입장에서는 그저 부끄럽고 수치스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이를 마음 아프게 생각한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란 말을 처음 사용하면서 어린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해야 한다고 외친 거 아닌가. 그때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다곤 하나 아직도 우리 주변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어린이 학대’가 사회 문제로까지 등장하는 게 현실 아닌가. 몇 해 전, 이 지면을 통해 발표한 동시를 한 출판사에서 책으로 펴낸 바 있다. 그 책 제목이 ‘아이의 마음이 길이다’였다. 때 묻지 않은 아이 마음만이 행복한 세상을 가져온다는 뜻에서 그렇게 지었다고 했다. 옳은 말이다. 그 첫걸음은 바로 각 가정에서 아이를 울지 않게 하는 것이다. 아이를 존중하며 대우하는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윤수천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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