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정신은 농심으로 근면 자주 협동이었다. 농심은 땅의 척박함과 품종을 탓하지 않는다. 덜 좋은 씨앗도 정성을 기울이면 싹이 나고 척박한 토양도 농심으로 가꾸다 보면 옥토가 된다. 한국은 제1, 2, 3차 산업혁명을 한 세대 만에 성공적으로 끝내고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접어들었으며 그 중심에 인공지능(AI)이 있다. 이 시대에는 농심에다 기업심을 융합해야 하는 기업가정신이 천하지대본이다. 개인소득의 결정 요인은 자본, 노동, 능력, 기업가정신, 출신 배경 등이지만 분배 관련 논의에서 기업가정신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방해하는 치명적인 오류다. 기업가정신과 경쟁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원동력이기 때문에 이 원동력을 무시하고 분배 논리를 주장하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오해를 불러와 반자본주의 정서를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기업가정신이란 번영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핵심이나 그 단어가 쓰이는 구체적인 문맥은 다양하다. 종종 위험부담자나 지도자의 임무조항, 개혁가나 창업가의 혁신, 경제발전의 수단 혹은 부의 불공평한 분배 요인을 의미한다. 경영대학에서는 새 사업을 시작하는 창업과 같은 의미다. 기업가정신은 본질적으로 이윤 창출 기회의 발견과 개척을 통해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며 자본주의의 청량제 역할을 한다. 첫째, 반드시 혁신적이다. 다른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것에서는 기업이윤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경제적 이윤을 낼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도입해야 한다. 둘째, 창조적이어야 한다. 이윤은 재화를 좀 더 가치 있게 쓰는 과정에서 발생하고 부를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셋째, 더 생산적이 되는 학습 과정이다. 기업가는 혁신을 통해 부를 창조하는 방법을 배우기 때문에 늘 학습하는 중이다. 혁신, 창조, 학습의 기업가정신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물을 주어진 대로만 볼 게 아니라 열린 견해로 봐야 사물의 다양한 용도와 가치를 발견하고 학습할 수 있다. 한 사물의 경제적 중요성은 시간과 각자의 지식 수준에 따라 사람마다 다른 가치를 가질 수 있다. 사물의 가치는 그것의 값진 용도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금전적 가치가 크지만 그 유용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치가 거의 없다. 예를 들면 19세기에 다이아몬드 원석은 아프리카 원주민에게는 장난감이었지만 영국의 탐험가에게는 고가의 보석이었다. 19세기 말까지 중동지방에서는 땅에서 솟아 나오는 흑갈색의 액체를 구역질 나는 백해무익한 것으로 여겼으나 내연기관의 연료로 가공될 수 있다는 것을 안 미국인은 ‘검은 황금’으로 봤다. 천지에 흔한 모래 규소는 정보기기에 꼭 필요한 실리콘 웨이퍼로 가공된다. 기업가정신은 어떤 것이 통상 생각하는 것보다 더 높은 가치가 있는 용도를 갖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기업가의 이윤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한 것보다 더 높은 가치가 있는 용도를 발견하는 것에 대한 보상이고 발견된 가치에 대한 정당한 요구다. 모두가 기업가정신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주어진 환경에서 각자는 최선을 다해 최선의 결과를 얻으려고 노력하며 더 좋은 방법을 발견할 때마다 그 발견을 이용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기업가정신이라는 용어는 대부분 기업이라는 조직을 통해 상당한 경제적 이윤의 기회를 발견하고 부를 창출해 많은 사람이 혜택을 얻어 다른 사람들이 따라 하게 되는 경우를 일컫는다. 기업가가 새로운 부를 창출할 기회를 발견한다는 것은 상황에 대한 개인적 인식과 역량의 문제로 객관적 확실성이 희박하다. 그 기회가 새로운 부를 창출할 수 있는가에 대한 성공 여부는 그것을 실행해 보기 전에는 아무도 올바르게 예측할 수 없다. 기업가적 기회의 발견은 종종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 우연히 있게 된 누군가에 의해 갑자기 이뤄지기 때문에 우발적이다. 기업의 역사를 보면 새로운 부의 창출 기회 발견에 대한 공통적인 결정 요인은 없다. 아무도 누가 성공한 기업가일지, 어떤 종류의 혁신이 어떤 분야에서 만들어질지 예측할 수 없고 따라서 계획할 수도 없다. 최선의 방법은 시장에서 모두가 최상의 역량으로 기업가정신을 발휘해 각자의 발상을 시도하도록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실패할 것이고 더 많은 사람들은 시도하기를 주저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성공적으로 혁신할 것이고 그 성공은 차례차례 넓게 모방될 것이다. 이것이 자유경쟁 시장체제의 진정한 이점이다. 즉, 각자의 발상을 기꺼이 역량을 다해 자유롭게 끊임없이 시도하고 실험해 봄으로써 그 결과로부터 혜택을 보거나 고통을 받는 경쟁을 통해 증명된 승자를 선택하는 것이 자유시장이다. 이것이 바로 자유경쟁 시장체제에서 기업혁신과 경제발전이 어떤 다른 형태의 경제체제보다 더 빠르고 더 활발한 이유다.
제21대 대통령선거에서 노동 관련 공약이 자못 주목을 받고 있다. 노동시간 단축이냐, 노동시간 유연화냐 하는 노동시간 문제부터 정년 연장 문제, 산업재해에 대한 기업주 처벌을 강화하는 문제, 최저임금을 지역이나 국적에 따라 차등 지급하는 문제 등에 대해 이른바 진보와 보수 진영 후보자가 내건 공약은 선명하게 대립한다. 대체로 진보 진영 후보는 노동자의 각종 권익을 보호, 강화하려 하며 보수 진영 후보는 기업의 경영 여건을 개선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이 같은 노동정책의 대립에는 그 심층에 노동의 의미에 관한 상당히 다른 견해 또한 있는 듯하다. 사람은 왜 일을 할까. 이 물음에 누구든 우선은 ‘먹고살기 위해서’, 그다음으로는 ‘좀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사람은 생존의 욕구와 더 나은 삶의 갖가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일을 한다. 그러나 이 단순해 보이는 욕구나 욕망을 채우는 일이 인류 역사에서는 결코 간단했던 적이 없다. 생존 여건이 가장 녹록지 않았던 원시사회에서 채집을 위주로 살던 인류의 조상들은 역설적으로 열매를 따 먹는 평범한 일상에서 한없는 감사와 황홀함을 느꼈고 사회적 관계도 상당히 평등했다. 그러다 한곳에 정착해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인간에게 노동은 축복과 고통이 함께하는 일이 됐다. 생활의 안정을 보장하는 부가 축적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축복이었지만 더 많은 수확은 얻기 위해 그리고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자연 및 이웃과 싸우는 과정은 고투였다. 그리고 근대 이후 더 많은 향유와 전면적인 지배를 위해 자연과 사회를 통제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더욱 노골화했다. 그 결과 21세기 인류는 이제 갖가지 지성적인 작업도 함께해주는 훌륭한 비서인 챗GPT를 얻기에 이르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 생태계의 질서를 돌이킬 수 없이 파괴하고 말았다. 인류 노동의 역사를 이같이 스케치해 얻는 한 가지 새로운 생각의 실마리는 오늘날 진보 진영은 노동의 고통과 재앙에 주목하고 있는 데 반해 보수 진영은 노동이 가져다준 축복의 측면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노동 방법의 발전, 즉 기술의 혁신은 인간사회에 물질적 풍요와 육체적 편의를 가져다줬다. 그렇지만 기술 발전과 노동의 효과적 조직화에 대해 지나치게 긍정하고 집착하는 사람들은 사실 재앙 수준의 기후 위기, 생물 다양성 고갈의 문제나 지나친 경쟁으로 심신이 극도로 피폐해진 사람들의 건강한 삶에 대해서는 사실상 크게 관심이 없고 근본적 해결책도 없다. 사람은 살면서 누구든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삶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노동이 행복한 노동이 돼야 하는 이유는 매우 분명하다. 물론 이 일은 쉽지 않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제까지의 노동은 축복과 고통이 교차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노동이 좀 더 즐거운 노동이 되려면 이제까지 노동이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웠던 측면을 개선하는 데 힘쓰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예컨대 첨단 기술이 이윤의 극대화가 아니라 자연 생태계와 노동하는 사람들의 건강을 세심하게 도덕적으로 고려하는 쪽으로 말이다.
성남시가 한국남동발전㈜의 사업 계획을 반려했다. 도시계획시설 실시 계획 변경인가 신청이다. 접수된 지 1년3개월 만에 내린 결정이다. 분당복합발전소를 현대화하는 사업이다. 1993년부터 가동된 난방열·전력 공급 시설이다. 내구연한 30년으로 설계됐고 기한이 지났다. 시설이 노후해 작동에 어려움이 크다. 설비 부품 수급에도 차질이 있다. 1조2천억원을 들여 이를 현대화하려 했다. 이 사업 신청이 성남시에서 반려된 것이다. 성남시 관계자가 반려 사유를 설명했다. “발전소와 인접한 단독주택지 완충지역 확충 등 주민 환경 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이 과정에서 의견차가 이어져 왔다. 이런 의견에 대한 문제를 해소할 필요가 있어 종합적인 의견을 검토해 반려했다”고 밝혔다. 반려는 제출된 계획을 처리하지 않고 되돌려 줌을 뜻한다. 발전소 현대화 사업의 완전 부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조정을 거쳐 잘 진행돼야 한다. 시민 모두의 일이다. 분당복합발전소가 책임지는 지역은 성남 등 일대다. 20만가구이니까 1개 거대 도시 규모다. 청정 연료인 LNG를 사용해 전력과 난방열을 생산한다. 발전사 최초로 발전용 연료전지를 설치했다. 설비 개선으로 친환경 발전소를 유지한다. 석탄·핵을 사용하는 발전시설과는 많이 다르다. 현대화 사업의 궁극적 목적도 친환경 강화다. 대기 배출 물질(NOx) 88%, 온실가스(CO2) 32%를 저감시키겠다는 게 이번 사업이 밝히고 있는 목표다. 물론 지역 민원은 있게 마련이고 중요하다. 완충 지역 확충도 인근 주민에게는 중요한 문제다. 앞서 다른 형태의 민원도 접수된 바 있다. 지난 16일 분당 국회의원 등이 제출한 주민청원서다. 분당동 주민복지관 신규 건립 요구를 했다. 한국남동발전㈜은 지역사회와의 소통을 강조했다. “의견을 청취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향후 성의 있는 대화로 결실을 맺을 것을 기대한다. 시, 주민, 회사가 풀어 가야 한다. 지적하고 갈 것은 이 사업의 시급성이다. 발전소 내구 연한 30년이 이미 지났다. 효율성은 떨어졌고 설비는 노후했다. 당장 시작해도 2033년 10월에나 끝난다. 시공사까지 지난해 10월 계약된 상태다. 매월 수천만원의 이자 비용이 나간다고 한다. 이 결정을 성남시가 1년3개월을 갖고 있다가 반려했다. 빠른 결정이 아쉽다. 지역사회 초대형 SOC다. 기업이 1조2천억원을 쓰는 사업이다. 지역 안위와 기업 생존이 걸려 있다.
경찰의 책임을 무조건 추궁할 수 없다. 그런 매도를 당하고 있을 경찰도 아니다. 하지만 동탄 납치 살인 사건은 다르다. 비참하게 살해된 피해자는 30대 여성이다. 지난 12일 오전 화성의 한 아파트에서 숨졌다. 범인은 한때 이 여성과 생활하던 30대 남성이다. 남성이 여성의 오피스텔에서 강제로 납치했다. 자신의 아파트로 끌고 가 흉기로 살해했다. 전형적인 교제 후 보복 범죄 유형이다. 남성은 여성에게 접근하면 안 되는 법률적 상태였다. 상습 폭행에 의한 접근 금지 조치였다. 그런데 어떻게 납치와 감금, 살해가 이어졌을까. 여기 이해 못할 경찰 대처가 있다. 여성이 경찰의 문을 두드린 것은 지난해 9월9일이다. 112 신고를 통해 남성의 폭행 사실을 신고했다. 경찰도 지속적인 폭행이 있었음을 확인했다. 당시 동거 관계였던 둘 사이의 행위였다. 일상적 가정폭력으로 해석하는 게 옳았다. 피해자 진술을 종합적으로 판단했어야 했다. 하지만 경찰은 단순 교제폭력 정도로 봤다. 현장 종결이라는 경미한 조치로 끝냈다. 경찰이 떠난 뒤 여성이 닥친 상황은 어땠을까. 끔찍한 상황에 내몰렸을 것이다. 올해 2월23일, 여성이 또다시 112로 경찰을 찾았다. 이 두 번의 신고만으로도 사건의 심각성은 설명됐다. 하지만 이번에도 현장 종결로 마무리됐다. ‘단순 말다툼이었다’는 진술을 그대로 믿고 끝냈다. 경찰이 떠난 뒤 상황이 나중에 알려졌다. 남성의 심각한 가혹행위가 있었다. 112 신고는 이후에도 한 번 더 있었다. 동일한 남성에 의한 폭행을 신고한 동일한 여성의 신고가 세 번이나 됐다. 당연히 범죄 중대성, 재범성을 조사했어야 옳았다. 견디다 못한 여성이 남성을 고소했다. 절차에 따라 피해자에 대한 접근이 금지됐다. 하지만 여성은 극도의 불안 속에 생활했다. 폭행 피해 등을 증명하는 600쪽 분량의 고소 보충 이유서를 경찰에 냈다. 이쯤 되면 폭행 피해자가 할 수 있는 조치는 모두 한 셈이다. 지난달 28일 경찰 담당 과장이 구속영장 신청 검토를 지시했다. 하지만 이마저 이뤄지지 않았다. 담당 형사가 휴직하면서 업무가 누락됐다고 한다. 그 열흘 뒤에 여성이 살해됐다. 경찰이 세 번의 112 신고를 단순 처리했다. 심각한 오판이다. 경찰이 고소 이후 불안 상태를 장기간 방치했다. 중대한 직무유기다. 경찰이 구속 수감의 시기를 업무 차질로 날렸다. 어이없는 업무 오류다. 아니라고 할 수 있나. 화성동탄경찰서장이 사과를 했던데. 사과는 지휘부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서장은 책임을 져야 하고, 담당 경찰들은 징계·처벌을 받아야 한다. 피해자 유족에 대해 국가와 경찰이 져야 할 민형사 책임도 명백하다.
예부터 다양한 의미가 있었다. 깃발 이야기다. 특히 병영에서 그랬다. 부대의 존재를 과시했다. 장군의 지휘권도 상징했다. 전투 중에는 위치도 알렸다. 그래서 기수는 적이 최우선으로 노리는 타깃인데도 늠름하게 위치를 특정했다. 이 때문에 담대하고 용맹한 병사들이 맡는 명예로운 직책이었다. 영토나 영역의 표시이기도 했다. 적군이 점유하던 곳을 점령한 후에는 아군의 깃발로 바꿔 달았다. 이때 노획한 적군의 깃발은 아군의 빛나는 전공을 상징하는 증거 중 하나로 보관됐다. 전후 적군과의 화친이 성립돼도 반환을 꺼렸다. 19세기 말 신미양요 당시 미군에 빼앗긴 장수를 뜻하는 수(帥)자가 적힌 깃발이 대표적이다. 베트남 파병 당시 노획한 금성홍기가 전쟁기념관에 전시 중이다. 해병대 제2사단(청룡부대)이 노획한 베트콩기도 보관하고 있다. 동티모르 파병 당시 상록수부대가 인도네시아 국기를 노획한 사례도 그렇다. 세계사의 흐름을 이해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프랑스 ‘삼색기’는 혁명의 불꽃 상징으로 세계 곳곳의 계급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대영제국의 상징인 ‘유니언 잭’은 제국주의의 확장을 촉발했다. 공산권 국가의 상징인 ‘오각별’은 거대한 이념집합체를 의미했다. 지난해 겨울부터 광화문과 여의도 등지에서도 다양한 깃발이 나부꼈다. 평화를 사랑하고 불의에 저항하는 몸짓이었다. 청마 유치환 시인의 ‘깃발’이 떠올랐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아아! 누구던가?/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며칠 후면 우리 마음에 새로운 깃발이 걸린다. 어떤 형태와 내용일까.
혜소국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다. 혜소국사는 고려 광종 23년(972년) 안성에서 출생해 10세에 출가했으며 17세에 융천사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국사는 말년을 칠장사에서 보내면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현재 비는 비받침인 귀부(龜趺)와 비몸돌, 머릿돌이 각각 따로 놓여 있는 상태다. 흑대리석으로 만든 비몸돌의 양쪽 옆면에는 상하로 길게 두 마리의 용을 새겨 놓았는데 그 솜씨가 뛰어나다. 문종 14년(1060년) 세워진 이 비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의 장수인 가토가 이 절에 왔을 때 어떤 노승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잘못을 꾸짖자 화가 난 가토가 칼을 빼 베었다. 노승은 사라지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리니 가토는 겁이 나 도망쳤다고 한다. 현재 이 비의 몸돌이 가운데가 갈라져 있어 이러한 이야기를 뒷받침 하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118년 전 한 장의 사진이 남겨졌다. 산속에서 총을 든 조선 청년들, 그 곁에 외국인 기자 한 사람이 있었다. 1907년 가을 영국의 종군기자 프레드릭 아서 매켄지가 경기 양평군 오빈리에서 의병을 만나 촬영한 사진이다. 오늘날 이 사진은 교과서, 박물관, 신문 기사 속에서 익숙하게 등장하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그 안의 인물들에게 묻지 않는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들의 이름도, 나이도, 마지막 순간도 알 수 없다. 우리는 그 얼굴들을 수없이 봐 왔지만 한 번도 그들의 삶과 죽음을 상상해보지 않았다. 왜 우리는 그들을 잊었을까.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무명의병들 역사는 기록을 남긴 자의 몫이다. 안중근, 유관순 같은 독립운동가는 기록이 남아 있기에 기억할 수 있다. 하지만 수많은 순국 독립운동가는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다. 싸웠지만 드러나지 않았고 그렇게 잊혔다. 기록을 남기면 일제에 체포되고 탄압당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놓친 진짜 독립운동가는 누구입니까.” 1906년부터 1911년까지 일본군이 남긴 ‘조선폭도토벌지’에 따르면 전국에서 1만7천779명의 의병이 전사했다. 경기도 출신만도 1천288명에 이른다. 그러나 공식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이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름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역사 속에서 ‘사살된 폭도 ○○명’으로만 남아 있다. 우리는 그들을 역사의 가장자리로 밀어냈다. 무명의병을 찾아 떠난 3년의 여정 세계는 이름 없는 무명용사를 기억한다. 프랑스 개선문 아래 무명용사의 묘,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에는 ‘신만이 아는 병사’가 잠들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무명의병을 기억하지 않았다. 의병의 전투 기록은 남아 있지만 우리는 오랫동안 이름 있는 의병장 중심으로만 기억해 왔다. 2022년 몇몇 역사학자가 잊혀진 무명의병 찾는 일을 시작했다. 양평 오빈리 사진 속 의병의 흔적을 따라가며 기록을 모았고 영상과 카드뉴스, 학술포럼, 시민 행사로 확장됐다. 2023년에는 경기도의회가 ‘경기도 무명의병 기억 및 지원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으며 2024년부터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이 본격적인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025년에는 강연과 포럼이 열리고 무명의병에 대한 기억을 시민과 함께했다. 이는 단순한 과거 정리가 아니라 기억을 다시 세우는 윤리적 실천이다. 무명의병 기억은 우리 시대의 책임이다 무명의병은 누구의 아버지였고 이웃이었으며 조선이라는 나라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자리를 비워두지 않았다. 그저 지워 버렸을 뿐이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그들을 다시 불러야 한다. 이름은 없어도 그 정신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우리가 무명의병을 기억한다는 것은 단지 과거를 곱씹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는지를 되묻는, 미래를 향한 실천이다. “산천초목만이 기억하던 이름, 이제 우리가 부르겠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으로부터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 중국 입국의 복잡한 행정절차 중국 최변방 고비사막 국경도시 ‘엘렌하오터’에서 중국 통과를 위한 복잡한 행정절차를 마쳐야 한다. 중국은 외국인의 자동차 여행을 금지하고 있다. 예외적으로 중국 정부의 허가를 받는 경우 제한적으로 허가한다. 우리는 서울에서 출발 전에 중국 컨설팅회사와 접촉, 우리 자동차의 중국 입국 허가 절차를 미리 마쳤다. 중국 컨설팅회사를 통해 5개 중앙부처(총참모부, 공안, 해관총서, 외교부, 문화관광부)의 허가를 받아 놨다. 컨설팅회사를 통해 중국 자동차 번호판 발급, 자동차 등록, 자동차보험 가입 등 여러 절차를 마쳐야 한다. 중국은 ‘국제운전면허증’이 통용되지 않는 나라다. 컨설팅회사를 통해 중국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아야 한다. 여행 준비 과정에서 국가 간 자동차의 자유로운 여행을 지원하는 ‘제네바국제조약’이 있고 우리는 ‘가입국’, 중국은 ‘미가입국’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중국은 외국 사람이 자동차를 타고 와 소수민족 인권 및 환경 문제 등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외국인의 자유로운 자동차 여행을 통제한다. 입국허가 당시 사전에 우리 차가 지나갈 코스를 중국 정부에 신고했다. 우리 차량이 신고 지역을 벗어나는지 감독하는 감독관 한 명이 내몽골 국경부터 탑승해 함께 여행해야 한다. 이 사람은 ‘류 선생’이라고 부른다. 다행히 조선족이라 의사소통이 자유롭다. 중국 영토를 벗어날 때까지 류 선생의 급여, 숙식비 등 제반 비용도 우리가 부담해야 한다. 입국허가, 운전면허증 발급 등 중국 입국 비용이 상상 이상으로 거액이다. 옛날 실크로드 상인이 오아시스를 통과할 때 통행세를 냈던 것처럼 중국에 통행세를 낸다고 생각하고 있다. 엘렌하오터에서 한국에서 자동차부품 ‘터보’를 가져온 조선족 박씨를 만났다. 이미 울란바토르에서 중고 부품을 교체했기 때문에 터보는 예비용으로 가져가기로 한다. 박씨의 ‘터보’ 부품 공수 여비를 우리가 부담한다. 중국 입국 다음 날 중국 세관에서 자동차를 찾아왔다. ‘자동차 번호판’, ‘운전면허증’도 나왔다. 이틀 동안 쉬면서 빨래도 하고 시내에서 발 마사지도 받는다. 컨설팅회사의 한 사장이 베이징에서 이곳으로 와 통관 업무를 대행해 줬다. 그리고 우리 일행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오랜만에 푸짐한 중국 요리와 바이주를 먹는다. 컨설팅회사 사장에게 “한국은 여러 명의 남자 중에 여자가 한 명 있으면 여자를 ‘홍일점’이라고 한다. 중국은 이런 상황에서 여성을 어떻게 부르나”라고 질문하자 ‘봉황’이라 한다고 했다. 사장은 오랫동안 외국인 자동차 여행 업무를 해 왔는데 여성 입국자는 내 아내가 처음이라고 말하며 아내에게 험난한 장거리 자동차 여행 참가에 존경한다고 말한다. ■ 공룡화석 보고 ‘고비사막’ 고비사막은 공룡화석의 보고다. 지금은 척박한 사막이지만 아마 2억~3억년 전에는 초목이 우거지고 많은 공룡이 살았던 지형으로 추정된다. 엘렌하오터 외곽의 ‘공룡 지질학박물관’은 1920년대 러시아 지질학자들이 공룡화석을 발굴했던 장소인데 중국이 대규모 야외 공룡 박물관을 만들었다. 수십마리의 공룡뼈가 뒤엉켜 있는 어마어마한 공룡화석 매장지와 공룡알 화석이 인상적이다. 변방까지 찾아오는 사람이 적은 고비사막의 오지여서 평일 관람객은 필자와 아내뿐이다. 공룡에 관심이 많은 서울에 있는 어린 손자들이 생각난다. ■ 내몽골(중국)과 외몽골(몽골)의 차이점 몽골이 독립하기 전인 100년 전 ‘자민우드’와 ‘엘렌하오터’는 같은 몽골족 마을이다. 현재 두 지역은 국경 철책선을 사이에 두고 완전히 다른 도시가 됐다. 중국 땅은 나무를 많이 심어 녹음이 울창하고 시내 도로가 6차선 뻥뻥 뚫리고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다. 도시의 가로수, 공원의 나무는 고무 호스로 하루에 몇 번씩 물을 흠뻑 준다. 400㎞ 이상 멀리서 물을 끌어와 변방의 고비사막에 초현대식 오아시스 도시를 건설해 놓아 두 도시가 비교된다. 시내에서 대낮에도 폭죽을 터뜨리는 소리가 자주 난다. 처음에는 폭탄 터지는 소리인 줄 알았다. 결혼식, 생일날, 개업일 등 번성하라는 의미로 밤낮으로 폭죽을 터뜨린다. 주민들은 우리나라 것보다 훨씬 큰 해바라기 씨앗을 잘도 까먹는다. 몇 사람만 있어도 목청이 크고 소란스럽다. 언어가 ‘사성 구조’여서 목소리가 크다고 한다.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아랍 군대가 많은 당나라 군인을 포로로 잡아갔다. 아랍인들은 중국인 포로의 시끄러운 목소리를 처음 듣고 신기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중국 정부는 구글, 카카오톡, 네이버 등 외국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우리가 서울에서 가져간 무전기 ‘워키토키’는 반경 5㎞까지 통신이 된다. 워키토키로 서로 간 연락을 하기로 했다. 간첩죄가 엄하게 적용된다는 소문에 중국에 체류하는 동안 SNS는 적게 사용할 생각이다. 중국 여행을 동행하는 감독관 류 선생은 지린성 출신 51세의 조선족 남자다. 류 감독관은 우리들 여행의 일거수일투족을 정부 당국에 보고한다고 한다. 류씨 앞에서 중국 정치 얘기, 시진핑 주석 얘기 등 예민한 것은 입도 벙긋하지 말아야 한다. 여행하면서 남의 감시를 받는것은 정신적으로 피곤하고 심리적 스트레스다. 아내는 중국의 심한 감시에 신경이 날카롭다.
이런 대선은 없었다. ‘지각 공약집’ 얘기다. 선거 공약이 조각조각 제시되고 있다. 드라마 ‘쪽대본’을 보는 듯하다. 찾아보려면 일일이 언론을 들춰야 한다. 진작 배포됐어야 할 공약집이 없어서다. 21대 대통령선거 사전투표는 오늘 시작이다. 그런데 국민의힘 공약집은 26일 공개됐다. 그나마 책자 발간은 더 늦었다. 민주당은 더 심하다. 28일 오후에 공개했다. 사전투표를 반나절 앞두고 나온 것이다. ‘탄핵 대선’의 촉박함만 탓할 것도 아니다. 돌아보면 대선에서 공약은 늘 경시됐다. 선거 공약을 관리·공개하는 곳이 선관위다. 역대 대통령선거 후보들의 공약도 선관위 홈페이지에 있다. 그런데 이게 뒤죽박죽이고 엉망이다. 경실련이 1987년 이후 대선 공약서 공개를 살폈다. 76명의 후보 중 32명은 벽보만 공개하고 있다. 2명은 공보만, 1명은 공약서만 공개했다. 공약 자료가 온전히 공개된 후보는 17명에 불과하다. 백년대계 국가 경영 약속이다. 그 자료가 이렇다. 대선 공약이 이 정도면 지방선거는 어떻겠나. 때마침 본보가 그 실태를 추적해 보도하고 있다. 기획 시리즈 ‘의원님 뭐하세요-광역의원 공약 추적기’다. 지역 맞춤형 공약의 현재 이행률을 봤다. 23.6%였다. 2013년 조사했을 때는 21%였다. 나아진 게 거의 없다. 그나마 경기도의회는 나은 편이다. 공개된 공약이 꽤나 많다. 다른 광역의회는 공개 자체가 없다. 이행 여부를 대조할 근거가 사라진 셈이다. 저마다 지역맞춤형 공약이라며 했을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 근본 문제는 법률에 있다. 공약 관련 규정은 공직선거법 제66조(선거공약서) 제7항이다. ‘관할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공약서를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시하는 등 선거구민이 알 수 있도록 이를 공개할 수 있으며, 당선인 결정 후에는 그 임기 만료일까지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시할 수 있다.’ 문구만 그럴듯하다. 여기에 결정적인 흠결이 있다. 강제규정이 아니다. 임의규정이다. 후보자가 공개 않겠다고 버티면 그걸로 끝이다. 경실련도 문제를 지적했다. 법 개정 요구다. ‘공개해야 한다’는 강행규정으로 바꿔야 한다. 인터넷을 통한 정보 공개는 일상이다. 아주 간단한 절차만으로 공약 공개는 실현될 수 있다. 이걸 왜 ‘할 수 있다’는 임의규정으로 풀어놨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시대에 안 맞고 유권자 요구에도 반한다. 이번에는 동기까지 부여됐다. 공약집 없는 대선을 국민이 비난하고, 경기일보를 통해 허술한 공약 관리가 확인됐고, 경실련이 성명으로 법 개정을 촉구했다. 모든 유권자가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