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법은 국회, 사법은 대법원, 행정은 정부다. 이 세 권력은 서로 견제하며 존재한다. 이 삼권분립이 국가를 국가답게 유지한다. 2024년 12·3 계엄에서도 우리는 목도했다. 대통령은 군경을 동원해 계엄을 선포했다. 국회는 심야 의결로 그 계엄을 풀었다. 사법부는 현직 대통령을 구속했다. 혼란이 그렇게 물골을 따라 가듯 정리됐다. 그때 작동된 국가 시스템이 바로 삼권분립이다. 침해받지 않는 입법·사법·행정이 그렇게 소중하다. 갑자기 그 삼권분립을 논할 현안이 생겼다. 대법관에 비법조인을 앉힌다는 얘기다. 국회의안정보 시스템에 떠 있는 내용이다. 제안 법안 법원조직법 개정안, 제안 일자 2025년 5월23일, 제안자 ‘박범계 의원 등 10인’이다. 법안 목적이 설명돼 있다. 대법관의 업무 부담 경감과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 보장이다. 구체적 법률 개정 방향을 밝히고 있는데 두 가지다. 현재 14명인 대법관을 30명으로 늘리는 것이 하나고, 비법조인을 대법관에 임명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 다른 하나다. 여기서 논쟁이 불거진 것은 후자다. 최종심을 비법조인에게 맡기자는 제안인데 옳은가. ‘비법조인’의 자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학식과 덕망이 있고 각계 전문 분야에서 경험이 풍부하며 법률에 관한 소양이 있는 사람’. 이런 이들을 임명하면 얻게 되는 기대도 설명하고 있다. ‘다양한 배경, 경력, 가치관을 가진 인물들이 대법원으로 진입할 기회가 확대되고 변화하고 있는 사회적 흐름과 사회의 다원적 가치를 반영하는 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 다원적 가치? 판결에 다양한 가치가 반영돼야 하나.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다. 법률은 그런 법을 규범화한 것이다. 재판은 그 법률 해석을 행위에 적용하는 절차다. 배경, 경력, 가치관이 선입견을 줘선 안 된다. 또한 법관은 달라도 판결은 예측 가능해야 한다. 양형 기준이라는 약속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작금의 ‘판결 충돌’의 원인도 여기에 있다. 판사에 따라 ‘징역형-무죄-유죄’를 오갔다. 진영이 서로 ‘오염됐다’며 불신했다. 이걸 아예 외부인에게 맡기자는 건가. 좌·우, 노·사의 한 쪽에 재판봉을 주자는 것인가. 정도는 다르지만 비법조인의 참여 방식은 있다. 2008년부터 운영되는 국민참여재판이다. 20세 이상 국민이면 배심원이 될 수 있다. 법관 독점 견제, 각계 여론 반영 등 취지가 이번과 닮아 있다. 국민참여재판은 효과를 거두고 있을까. 이 판단은 유보하는 대신 미국의 예를 설명해본다. 대표적인 배심원제 국가였다. 그런데 법관 재판이 높아지고 있다. 거꾸로 배심원 재판은 1%까지 낮아졌다. ‘비전문·편향’이 초래한 불신 때문이다. 정치 빼고 토론해 보자. 논쟁거리도 아니다. 대법관 독립이 사법부 독립이다.
지난 22일 미국의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에 의하면 미 국방부는 주한미군 총 병력 2만8천500명 중 4천500여명을 미국령 괌이 포함된 인도태평양의 다른 지역으로 옮길 계획을 마련하고 있으며, 이는 수립 중인 국방전략(NDS)과 함께 다뤄질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또 상기 보도에서 이 계획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아직 보고되지 않았지만, 미국 정부 고위 관계자들 사이에 논의되고 있는 여러 가지 아이디어 중 하나라고 했다. ‘미국 우선주의’를 주장하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은 전통적인 동맹관계에 대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한미동맹에도 불구하고 안보·통상위기를 맞고 있다.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도 지난 15일 심포지엄에서 한국을 “일본과 중국 본토 사이에 떠 있는 항공모함”이라고 부르는 등 주한미군 역할 재조정을 시사한 바 있다. 또 최근 미국 국방정보국(DIA)이 분석한 ‘2025년 세계 위협 평가’ 보고서에서 “북한이 한국을 침투할 능력이 충분하다”고 평가했다. 이런 월스트리트저널 보도에 대해 미국 국방부 관계자는 지난 23일 “주한미군을 감축하려 한다는 언론 보도는 사실이 아니다. 미국은 한국의 안보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고 부인했다. 우리 국방부도 23일 미국과는 “주한미군 철수와 관련해 한미 간 논의된 사항은 전혀 없다”고 했다. 주한미군 주둔 규모는 미 국방수권법(NDAA)에 의한 사항이다. 올해 NDAA는 한국에 배치된 2만8천500명의 미군 병력을 유지할 것을 못 박고 있다. 그러나 현재 미국 상·하원은 공화당이 우세하고 트럼프의 당 장악력도 강하기 때문에 주한미군의 규모 감축이나 역할 재조정 문제는 언제든지 대두될 수 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군 방위비 문제를 통상문제와 연계시켜 협상을 요구할 경우 한국의 안보 상황은 큰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 1기 때도 주한미군 철수를 검토한 바 있음을 상기한다면 주한미군 감축설을 미국 정부가 부인했다고 해서 추측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주한미군은 한미동맹의 상징임과 동시에 북한 위협에 대비하는 핵심 전력이다. 오는 6·3 대선 직후 새롭게 출범하는 정부는 군사안보 등을 비롯해 한미 관계 전반을 협의해야 하는 중차대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대선운동 기간은 물론 대선 후에도 주요 정당과 대선 후보들은 한반도의 안보 위기가 심각함을 인식해 주한미군 문제에 대한 국익 관철을 위한 철저한 준비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이 도시에는 특별한 공간이 있다. 촉촉한 대지에서 갈대들이 바람에 따라 눕고 일어선다. 안산시 상록구 사동 시화호 인근에 위치한 안산갈대습지 얘기다. 2005년 말 완공됐다. 당시 관할 주체는 한국수자원공사였고 ‘시화호 습지공원’으로 불렸다. 당초 명칭에 시화호가 들어간 연유는 인근에 시화호가 있어서였다. 이후 2014년 관할 주체가 안산시와 화성시 등으로 나뉘었고 안산 쪽 이름은 안산갈대습지가 됐다. 이 대목을 좀 더 들여다보자. 1994년 1월 시흥 오이도와 안산 대부도를 잇는 시화방조제가 완공되면서 시화호라는 인공호수가 형성됐다. 그런데 물이 가둬지자 공장 오폐수 등으로 수질이 악화됐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인공습지 조성에 나섰다. 안산갈대습지가 탄생된 배경이다. 이후 이곳에는 야생동물들이 쉴 수 있는 인공섬과 수중식물 및 야생동물 활동공간 등이 마련됐다. 전시장과 전망대를 갖춘 환경생태관도 들어섰다. 습지에서 정화된 물이 빠져나가는 생태 연못도 있다. 2014년부터는 람사르 습지 등재도 추진 중이다. 이곳에서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 ‘붉은발말똥게’의 대규모 서식지가 국내 최초로 발견(본보 23일자 8면)됐다. 녀석은 잡식성으로 진딧물, 지렁이, 죽은 물고기, 식물 잎 등을 먹는다. 그동안 주로 서해 일부 지역과 제주도 등지에서만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안산갈대습지에는 500여개체가 분포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안산환경재단은 안산갈대습지 입구부터 장전보까지 약 600m 구간에 걸쳐 이 녀석들의 집단 서식을 확인했다. 내시경 조사기를 활용한 현장 관찰과 서울대 연구팀과의 공동 조사 등을 통해서다. 시화호 최상류가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염분 농도가 낮은 진흙 지형과 넓은 갈대 군락이 형성됐다. 그래서 먹이활동과 은신에 적합한 최적의 서식환경을 갖췄다. 후손들에게 빌린 자연은 온전하게 물려줘야 한다. 환경 보전을 위한 리트머스 시험지여서다.
가정의 달 5월이 숨 가쁘게 지나가고 바람과 적당한 비를 맞고 새롭게 단장한 나무들은 생명의 기운이 가득하다. 5월은 역시 ‘탄생’이라는 단어와 잘 어울리는 달이다. 며칠 전 조용한 생일을 보냈다. 소란스러운 축하보다는 고요한 하루가 더 간절한 날이었다. 미역국도 챙기지 못하고 바삐 출근하던 시절엔 아침부터 축하 메시지가 쏟아지고 케이크와 꽃이 넘쳐 났지만 중년이 된 지금은 가족과의 시간과 마음의 안정을 먼저 챙기게 되는 날이다. 다른 날보다 느긋하게, 천천히 시작하는 생일 아침, 미역을 꺼내 불리면서 부모님에게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전하고 미역국으로 따뜻한 하루를 시작했다. 생일은 나이 한 살을 더하고 파티하는 날이 아니라 나를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감사하고 스스로의 존재를 축복하는 날이라는 것을 중년에야 깨달으니 문득 아쉬움이 감돈다. 이 소중한 의미를 이제라도 깨달아 감사할 따름이다. 한 매체에서 조사한 ‘생일 요리’에 관한 설문에서도 ‘연인을 위한 생일 메뉴’ 1위는 단연 미역국이었다. 생일 아침에 챙기는 미역국은 단순한 생일 음식이 아니라 우리의 지혜로운 음식이다. 언제부터 생일에 미역국을 먹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미역의 영양학적 가치는 고려시대 문헌에도 등장한다. 새끼를 낳기 위해 미역밭을 찾아드는 고래는 미역을 먹으며 몸을 회복한다고 알려져 있다. 영양이 부족하던 시절 미역국은 삼면이 바다인 이 땅에서 산모의 기력을 보하고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조상들의 지혜였다. 미역을 식재료로 먹는 국가는 많지만 생일에 우리처럼 미역국을 먹으며 탄생을 기억하고 축하하는 나라는 없다고 한다. 생일날, 세계의 식탁에는 어떤 축복의 음식이 올랐을까. 중국에서는 장수면(長壽麵)이라고 불리는 길고 가는 국수를 먹으며 장수를 기원한다. 면을 끊지 않고 먹는 것이 중요하며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복숭아 모양의 찐빵도 장수를 상징하며 생일상에 자주 오른다. 가나의 ‘오토(Oto)’는 으깬 얌이나 고구마로 만든 생일 아침 식사로 풍부한 탄수화물은 활기찬 시작을 상징한다. 네덜란드 남부에서는 생일에 케이크 대신 ‘블라이(Vlaai)’를 낸다. 체리, 살구, 쌀 푸딩 등을 채운 커다란 전통 파이로 한 조각만으로도 따뜻한 축하의 마음을 전하기에 충분하다. 친구나 가족들이 함께 만드는 경우가 많아 유대감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호주의 ‘페어리 브레드(Fairy Bread)’는 버터를 바른 빵 위에 알록달록한 스프링클을 얹은 간식으로 아이들 생일 파티에서 빠지지 않는 메뉴다. 다양한 생일 음식은 먹거리를 넘어 생일 축하 속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그 가치를 되새긴다. 생일을 축하하는 건 같지만 생일을 고마워하는 건 어쩌면 우리만의 방식이다. 그 마음은 미역국 한 그릇에 담겨 식탁 위에 올라온다. 미역국 한 그릇에서 시작된 우리의 생일문화와 세계 각국의 독특한 생일 음식은 단순히 개인의 식사가 아니라 가족과 친구들이 함께 모여 나누는 축하 언어다. 생일 음식을 함께 나누며 따뜻한 마음이 음식으로 오래도록 기억되는 것도 또 하나의 축복이다. 생일은 그렇게 식탁 안에서 우리 모두를 이어준다.
봄비 내리던 날 먼 길 떠나셨습니다 가족의 인연 맺은 지 42년 마지막 모습 생각하면 가슴이 아립니다 회한의 눈물 흐릅니다 6·25전쟁으로 남보다 강인해야만 살 수 있었던 실향민의 삶 인고의 세월 속에서 무에서 유를 일궈 내시며 꿋꿋하게 한 세기를 견디어 내셨습니다 송구한 마음 씻을 길 없어 ‘영가전’에 모시어 날마다 경 읽어 드리고 절 올리며 기도합니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꿈 속에서도 비옵나니 극락왕생 하시옵소서. 이성란 시인 ‘수원문학’ 신인상 당선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시인마을’ 동인
카네이션의 꽃말은 ‘여성의 애정’, ‘모정’이다. 어버이날이 다가오면 문방구 앞이나 꽃가게를 온통 빨간색으로 물들였던 카네이션이 생각난다. 핑크색 카네이션의 꽃말은 ‘부인의 애정’, 황색은 ‘당신을 경멸합니다’이다. 세계 주요 절화 중 하나이며 소형종은 분화용으로도 인기가 있다. 양지바른 곳에서 자라며 중부지방에서 노지월동은 힘들다. 원산지는 남부 유럽이며 석죽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세계적으로 카네이션을 많이 재배하는 나라는 스페인, 콜롬비아, 이탈리아 등이며 우리나라는 약 170ha가 온실에서 재배되고 있다. 농촌진흥원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우리는 여행을 단순히 ‘즐거움’으로만 생각하지만 관광산업이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상상 그 이상이다. 세계 각국은 국내총생산(GDP)과 고용의 약 10%를 관광에서 창출하지만 한국의 관광산업 GDP 기여도는 고작 2.8%로 비교 대상 51개국 중 최하위 수준이다. 지난해 방한 외국인 관광객 수는 코로나19 이전 수준인 약 1천637만명에 도달했으며 외국인 관광객의 지출액은 전년 대비 32%나 증가했다. 그러나 내국인의 관광 지출은 오히려 4.7% 감소하는 등 불균형이 존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관광산업의 핵심 축인 경기 및 인천지역의 관광혁신은 국가 경제 활성화의 열쇠다. 수도권은 국토 면적의 11.8%에 불과하지만 전체 인구의 50.8%가 밀집해 있으며 2020년 기준 세계 수도권 경제 규모 순위에서 4위를 기록할 정도로 경제적 잠재력이 크다. 차기 정부가 반드시 주목해야 할 수도권 관광 혁신안 세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디지털 기술 기반 스마트 관광 인프라 구축이다. 오늘날 관광객들은 단순히 ‘보는’ 관광에서 ‘경험하는’ 관광으로 변화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관광데이터랩의 빅데이터 분석에 따르면 관광객들은 관광지에서 더 짧은 시간을 머물지만 더욱 다양한 경험을 원한다. 차기 정부는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를 활용해 수도권 관광 정보를 실시간으로 제공하고 혼잡도 관리, 개인 맞춤형 관광 코스 추천, 축제장에서의 주차 및 식음 결제시스템 등 스마트 관광 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 특히 경기도와 인천의 잠재력 있는 관광지를 서울과 연계하는 AI 맞춤형 스마트 관광 생태계를 조성하면 관광객의 체류 기간을 늘리고 지역 간 관광 불균형도 해소할 수 있다. 둘째, 수도권 지역별 특화 관광 콘텐츠 개발이다. 현재 수도권 관광은 서울에 집중돼 있다. 차기 정부는 서울-인천-경기도를 아우르는 ‘수도권 관광벨트’를 구축하고 각 지역의 특성을 살린 관광 콘텐츠를 개발해야 한다. 서울의 도심·역사·문화와 인천의 해양·섬 관광 및 외래객 환승 관광, 경기도의 자연·생태·융복합 관광을 연계해 수도권 전체를 아우르는 다양한 관광 상품을 개발하는 것이다. 특히 MZ세대를 중심으로 급증하는 ‘마이크로 투어리즘(근거리 여행)’과 ‘숏컷여행(1박2일 수준의 짧은 숙박여행)’ 같은 트렌드를 반영한 수도권 내 특화 콘텐츠 개발이 시급하다. 셋째, 민관 협력 기반 관광산업 거버넌스 혁신이다. 관광산업은 숙박, 음식, 교통, 쇼핑, 엔터테인먼트, 체험 등 다양한 분야가 복합적으로 연계된 산업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관광정책은 부처별, 행정구역별로 분절돼 있어 통합적인 정책 추진이 어렵다. 차기 정부는 수도권 관광을 총괄할 수 있는 거버넌스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대통령실 내 ‘관광진흥비서관’ 신설과 지자체에서는 서울-인천-경기도를 아우르는 ‘수도권 관광협의체’를 설립해 지역 간 경계를 넘어선 통합적인 관광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수도권 관광 혁신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은 단순한 경제적 이익을 넘어 국가 브랜드 가치 상승과 문화적 자긍심 고취, 국민 삶의 질 향상까지 포함한다. 또 수도권을 통해 활성화된 관광은 다시 지방소멸지역 등과의 연계를 통해 시너지 효과를 창출할 수 있다. 차기 정부는 위에서 제시한 세 가지 혁신안을 핵심 국정과제로 채택하고 수도권 관광을 혁신하기 위한 범정부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것이 대한민국이 진정한 K-관광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수년간 기술을 개발하고 인력을 고용하며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회사를 운영해 왔다. 하지만 거래처 부도와 납품 대금 미수금이라는 외부 변수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폐업을 결정했다. 그가 쌓아온 기술력과 사업 경험은 금전적 가치로 환산하기 어려운 자산이다. 하지만 한 번의 실패가 ‘신용불량자’라는 낙인이 돼 재도전의 길은 너무도 멀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아직 실패에 대해 관대하지 않다. 과거의 부실 기록이 금융기관 평가에서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신용보증이나 대출 심사에서 불이익을 받는 일이 다반사다. 이처럼 재도전 의지가 있는 기업인조차 제도적 장벽 앞에 좌절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정부도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소벤처기업부는 ‘재도전 성공 패키지’를 통해 최대 1억원의 사업화 자금을 지원하고 있으며 ‘재창업 특화 교육’ 등을 통해 창업 실패자의 재기를 돕고 있다. 최근엔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도 재기 기업 전용 보증 프로그램을 확대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여전히 ‘실패 이력’에 대한 금융기관의 보수적 판단이 남아 있어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해외의 경우는 어떨까. 이스라엘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문화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창업 국가가 됐다. 실패한 이력이 있는 기업인에게도 동일하게 정부 보조금과 보증 혜택을 제공하며 심지어 민간 투자자들은 실패 경험을 오히려 ‘학습된 리스크관리 능력’으로 평가한다. 미국 실리콘밸리 역시 ‘빨리 실패하고 더 빨리 배워라(Fail Fast, Learn Faster)’는 문화 아래 실패는 성장의 필수 과정으로 간주한다. 유럽연합(EU)도 ‘세컨드 찬스(Second Chance) 정책’을 도입해 실패 기업인의 신속한 회생과 재창업을 위한 법제도 정비를 병행하고 있다. 물론 도덕적 해이를 경계해야 한다. 제도를 악용하는 일부를 가려낼 수 있는 신용평가의 정성적 요소, 도덕성 기반 스크리닝 시스템이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 그러나 이는 일부의 문제일 뿐 대다수 진정성 있는 창업가들이 재도전할 수 있는 사회적, 제도적 인프라를 갖추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제는 단순한 창업 장려를 넘어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재도전 친화적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다. 실패는 끝이 아니라 더 나은 시작이다. 그들을 다시 경제의 중심으로 이끌 수 있는 길을 지금 더 넓혀야 할 때다.
딱 3년 전 정치인 김용남의 옷은 붉은색이었다. 국민의힘 수원특례시장 후보였다. 수원은 민주당 절대 강세 지역이다. 5개 선거구 현역 의원이 모두 민주당이다. 개표 상황이 다음 날 오전 4시까지 박빙이었다. 최종 득표율 49.1%로 김 후보가 패배했다. 1위와의 차이는 0.57%, 2천928표였다. 전국에서 가장 큰 기초자치단체장선거였다. 130만 수원시민에게 강한 인상을 줬다. 4년 뒤 재도전을 말하는 지지자도 많았다. 그 옷이 19개월 만에 오렌지색으로 바뀌었다. 2024년 1월 개혁신당에 입당했다. 국민의힘 탈당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어떤 희망도 갖기 어렵다...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 얼마 전까지 윤석열 정부의 대표 선수였다. 윤석열 정부 성공을 연설했었다. 그랬던 그가 쏟아낸 비난이다. 지역 정치권은 싸늘했다. ‘국민의힘에서 총선 공천 안 주니까 탈당한 것’이라고 했다. 개혁신당에 빠르게 적응했다. 이준석 대표 측근이 됐다. 그때부터 16개월이 지났다. 또 바뀌었다. 이번에는 파란색이다. 5월17일 광주 서구로 내려갔다. 김대중컨벤션센터 광장 이재명 유세장이었다. 이 후보를 지지했다. 그 이유를 말한다. ‘내가 낸 책과 이 후보 공약이 똑같더라.’ 개혁신당 탈당의 변은 국민의힘 때와 같았다. “(개혁신당은) 한 사람의 팬클럽 수준으로 당이 운영된다.” 정말 그게 다 일까.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가 말했다. “총선에서 비례받고 싶어했는데 못 받은 분이다.” 정치철새들의 계절이다. 하도 많아 거명할 수도 없다. 그런데 정치인 김용남을 거명한 이유가 있다. 많은 시민이 그를 수원 토박이로 말한다. ‘남문시장 가겟집 아들’로 부르기도 한다. 동문회에서 그는 여전히 희망이다. 그래서 정치 입문부터 ‘수원의 미래 정치’였다. 초창기 남경필 전 지사와 갈등도 있었다. 그 모습조차 ‘당차다’며 지지를 보냈던 유권자가 많았다. 이렇게 기대를 모았던 그가 언제부터 ‘당적 장돌뱅이’처럼 됐다. 안쓰럽다. 어느 지역이든 지역만의 정치는 있고, 경기도 수부 도시 수원 정치도 그렇다. ‘도청·삼성 유치’라는 유산을 남긴 정치, ‘최초의 수원 출신 도지사’가 된 정치, ‘부총리·국회의장’을 역임한 정치가 있다. 저마다 이념과 정당은 달랐다. 하지만 저마다의 정치적 지조 속에 6~7선을 했다. 5·16계(이병희)로, 보수계(남경필)로, 민주계(김진표)로 살았다. 때론 낙선도 했다. 하지만 공천 찾아 극단의 정당을 찾지는 않았다. 이재명 지지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정책적 동질성 발견’이라고 그가 설명했다. 모쪼록 이게 마지막 선택이기를 바란다. 파란 점퍼가 그의 마지막 당복(黨服)이기를 바란다. 어쩌면 김용남 당복을 궁금해할 시민이 더는 없을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