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수정토’ 삼킴 사고 안전주의보…장 폐색 유발

수경 재배 등 본래 용도보다 어린이들의 촉감놀이용으로 자주 쓰이는 ‘수정토(워터비즈)’ 삼킴 사고가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수정토가 체내 수분을 흡수해 팽창하면 장 폐색 등 심각한 상해를 초래할 위험이 있으며, 해외에서는 사망 사고까지 발생했다. 한국소비자원은 수정토와 관련 사고 예방을 위한 안전주의보를 발령했다고 25일 밝혔다. 최근 5년간(2020.1.∼2024.12.) 소비자위해감시시스템(CISS)에 접수된 수정토 관련 안전사고는 총 102건이다. 매년 꾸준히 발생하고 있으며, 모두 14세 미만 어린이에게 발생한 사고였다. 연간 접수 현황을 살피면 ▲2020년 17건 ▲2021년 23건 ▲2022년 29건 ▲2023년 23건 ▲2024년 10건이다. 안전사고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시기는 활동 범위가 넓어지고 호기심과 탐색의 욕구가 강해지는 ‘걸음마기(1∼3세)’로, 총 69건(67.6%) 발생했다. 사고 원인은 ‘삼킴’이 45건(44.1%), 귀·코 등에 수정토를 집어 넣는 ‘체내 삽입’이 56건(54.9%)이었다. 연령대별로 분석한 결과, 연령대가 낮을수록 ‘삼킴’ 사고에 더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가정 내'에서 발생한 사고가 85건(96.6%)으로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해외의 경우, 미국에서는 수정토 삼킴으로 인한 사망 사고가 발생해 수정토를 완구·교구·기타 감각 도구 등 어린이용품으로 판매하지 못하게 하는 법안을 검토 중이다. 국내에서는 원래 크기에서 50% 이상 팽창되는 제품은 완구로 판매할 수 없게 돼 있으나, 수정토를 원예용·인테리어 소품 등으로 판매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소비자원이 온라인 판매 사이트 등을 일부 모니터링한 결과, ‘원예용품’임을 표시하거나 만 14세 미만 어린이가 사용하기 부적합한 제품이라고 안내하고 있음에도 수정토를 유아나 초등학생 놀이용으로 구매했다는 소비자 후기가 다수 확인됐다. 소비자원은 수정토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어린이의 보호자에게 ▲수정토를 본래 사용 목적에 맞게 사용 ▲어린이가 수정토를 가지고 놀지 않도록 지도 ▲안전한 용기에 담아 어린이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보관 ▲바닥에 떨어진 것이 없는지 꼼꼼히 확인 등의 주의사항을 알렸다. 아울러 만약 수정토를 삼키거나 체내에 삽입한 경우 즉시 병원을 방문해 어린이의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민경제 주역 식품업, ‘K-푸드’ 맛있는 기적 [지역경제의 개척자들]

광복 80주년 특별 기획 지역경제의 개척자들 7. 밥상에서 시작된 ‘식품산업’ 기쁨도 배고픔을 해결하지는 못한다. 광복 직후 국민에게 가장 절실했던 건 하루 한 끼의 평범한 식사였다. 1945년 200원이던 백미 한 말 값은 1948년 1천900원까지 오르며 식량난이 심화됐다. 곧바로 한국전쟁까지 겹치며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다. 자체적인 식량 생산이 부족했던 시절, UN의 민간 구호 원조를 통해 1954년까지 총 4억5천만 달러 규모의 물자가 국내로 유입됐다. 밀·옥수수·쌀·소금·메밀·캐러멜 등 다양한 식료품이 공급되며 국민의 밥상을 지탱했다. 이때 미국의 PL480(농산물 원조 프로그램)도 시행되면서 식량난 극복에 힘을 보탰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에 머무는 민족이 아니었다. 국민은 쌀 대신 보리와 밀가루로 밥상을 차리고, 이웃과 끼니를 나누며 일상을 지켰다. 그렇게 지은 밥 한 끼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서로를 살리고 국가를 일으키는 출발점이 됐다. 한국 식품산업의 뿌리도 그 치열하면서도 희망 어린 밥상 위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 같은 변화 중심엔 경기도와 인천이 있었다. 식품을 모으고 만들고 실어 나르는 기능이 집중, 밥상에서 시작된 산업들이 경인지역을 주축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경기도에서는 1967년 ‘빙그레’가 설립되며 아이스크림과 유제품을 넘어 국민 간식 문화의 일부가 된 대표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투게더와 바나나맛우유를 시작으로 비비빅, 메로나 등 시대를 대표하는 제품을 연달아 선보이며 국민 일상에 깊이 스며들었다. 현재 빙그레는 아시아를 넘어 베트남, 호주, 유럽 등으로 판매 지역을 다변화하고 있다. 1969년 설립된 오뚜기 역시 1973년 안양 호계리에 공장을 세우며 마요네즈, 케첩, 카레 등 국산 조미식품 대중화의 기틀을 마련하고 식탁의 변화를 이끌었다. 인천에서는 1938년 설립된 인천탁주(전 대화주조)가 해방 직후 밀주 단속과 쌀 배급제 등 시대의 굴곡을 넘어서며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처럼 경인지역은 단순한 생산 거점을 넘어, 변화하는 소비자 수요에 발맞춰 식문화의 진화를 주도해 왔다. 조미료와 제빵에서 출발한 기술은 간편식, 기능식품, 프리미엄 주류 등으로 확장되며 고도화됐고, ‘K-푸드’라는 이름 아래 세계 무대에서도 주목받는 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식품산업통계정보에 따르면 지난 2023년 기준 국내 식품시장 규모는 368조원에 달한다. 전자·석유화학과 더불어 국가 핵심 산업으로 성장한 수준이다. 이러한 식품산업 저변에는 시대의 흐름에 유연하게 대응해 온 경인지역 기업들의 경험과 혁신이 있었다. 이들은 오늘도 기술과 맛의 경계를 넓히며 세계 시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빙그레 관계자는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국민의 일상에서 함께 성장해 왔다”며 “광복 80주년을 맞아, 일상을 따뜻하게 채우는 먹거리로 앞으로도 더 넓은 글로벌 시장에 도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식문화 진화 주도한 경기·인천, 세계 입맛 사로잡은 ‘성장 엔진’ ■ 젖소가 많은 경기도…남양주에서 시작된 빙그레의 역사 일제강점기를 지나 맞이한 광복, 한국전쟁을 딛고 폐허를 탈바꿈한 민족, 우리나라 국민에게 식품은 절실한 힘이자 내일을 꿈꾸게 하는 희망이었다. 치열했던 삶의 터전에서 피어난 식품산업은 경인지역에서 굳건한 뿌리를 내렸고, 대한민국의 역사를 국민의 밥상과 함께 써 내려왔다. 지난 1967년 9월, 빙그레의 전신인 대일양행이 남양주군(현 남양주시)에 설립됐다. 창업주 홍순지 씨는 유제품 수요가 꾸준하다는 점에 주목해 1971년 대일양행을 대일유업으로 변경하며 본격적으로 유제품 사업에 뛰어들었다. 부족한 기술력을 보완하기 위해 1972년 미국 퍼모스트 맥킨사와 기술 제휴를 맺고, 국내에 아이스크림과 우유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미군 부대를 중심으로 아이스크림을 납품하던 대일유업은 젖소가 많았던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도농리(현 남양주시 다산동)를 눈여겨봤고, 1973년 6월 남양주 도농동에 제1공장을 준공했다. 그러나 공장 건설 도중 자금난에 부딪히며 대일유업은 한국화약그룹(현 한화)에 인수됐다. 이후 소비재 계열사로 편입된 대일유업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신제품 연구에 더욱 매진했다. ■ 위기를 기회로…빙그레 투게더·바나나맛우유의 탄생 당시 빙과류 시장은 설탕물을 얼린 제품이 주류였지만, 대일유업은 유제품을 넣은 아이스크림이라는 새로운 시도를 택했다. 이때 탄생한 ‘투게더’와 단지 모양 용기로 선보인 ‘바나나맛 우유’는 지금까지도 빙그레의 대표 제품으로 사랑받고 있다. 1979년 6월에는 남양주 도농동에 제2공장을 증설했고, 1981년에는 프랑스 소디마사와 기술 제휴를 맺어 국내 최초의 떠먹는 요거트 ‘요플레’를 선보였다. 더 나은 품질의 유제품 생산을 위해 해외 기술을 적극 도입한 대일유업은 1982년 사명을 지금의 ‘빙그레’로 변경했다. 이후 1986년 경기도 광주에 공장을 준공하고, 1987년 남양주 식품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성장을 위한 투자를 이어갔다. 1988년 서울올림픽 아이스크림 공식 공급 업체로 선정되고, 1999년에는 ‘바나나맛 우유’가 ‘20세기 한국을 빛낸 상품’에 이름을 올리는 등 국내 유업계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했다. 빙그레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소비자 입맛을 사로잡기 위한 제품 개발을 지속해왔다. 1992년에는 고급 과일로 여겨졌던 멜론을 아이스크림화한 ‘메로나’를 출시해 큰 인기를 끌었고, 현재까지도 대표 제품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 빙그레, 경인지역 경제 개척 이후 세계 시장 선도하다 빙그레는 단순한 유가공 기업을 넘어 지역 경제를 선도하는 개척자로 성장했다. 농촌 재건과 국민 건강에 기여하겠다는 목표 아래 남양주에 터를 잡고, 2012년에는 남양주시와 일자리 창출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2019년에는 남양주 일자리박람회에 참가해 구직자들에게 취업 기회를 제공하며 지역 발전에 힘을 보탰다. 이 같은 노력은 세계 시장으로도 이어졌다. 빙그레는 2016년 미국 현지법인을 설립하고, 2017년부터 ‘메로나’를 OEM 방식으로 생산해 코스트코 전 매장에 입점했다. 미국 법인의 매출은 2023년 598억 원에서 2024년 804억 원으로 35% 증가했고, 미국 내 한국 아이스크림 시장 점유율 약 70%로 독보적 1위를 기록 중이다. 또 중국에서는 바나나맛 우유의 현지화 전략을 통해 수익성을 개선했으며 베트남, 호주, 유럽 등으로도 판매 지역을 넓혀가고 있다. 빙그레 관계자는 “빙그레의 역사는 대한민국과 경기도의 경제 발전사와 맞닿아 있다”며 “앞으로도 브랜드 정체성을 지키며 지역 경제에 기여하는 기업이 되겠다”고 말했다. ■ 87년, 인천탁주가 빚어온 술 한잔의 역사 은은하고 구수한 단맛, 톡 쏘는 청량감을 지닌 막걸리를 마시면 기쁨은 배가 되고 슬픔은 씻겨 내려간다. 막걸리는 ‘막 걸러낸 술’, ‘대충 거른 술’이라는 뜻처럼, 친근하고 정감있게 서민들과 오랜 시간 함께했다. 인천탁주는 인천 대표 막걸리 ‘소성주’와 함께 87년 동안 인천시민의 삶과 동고동락했다. 인천탁주의 뿌리는 1938년 인천 중구 전동 자유공원 인근에서 시작된 ‘대화주조’다. 현재 정규성 대표의 할아버지가 일본인으로부터 양조장을 인수한 후, 욕조처럼 큰 통에 연탄을 때고 손수 저어가며 인천시민의 입맛에 맞는 막걸리를 빚었다. 사업 초기 막걸리는 단순한 술이 아니라, 전쟁 이후 서민들의 배를 채워주던 음식이기도 했다. 정 대표는 “대화주조가 있던 동네는 인천항과 가까워 그 당시 그나마 잘 살던 동네”라며 “그런 동네에서도 먹을 게 없어 막걸리 찌꺼기를 밥으로 먹기 위해 공장 앞에 줄 서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 불황을 넘은 품질의 힘··· 인천의 문화가 된 ‘소성주’의 탄생 1974년, 대화주조는 정부의 주세법 개정에 따라 인천지역 11개 양조장을 통합해 ‘인천탁주’로 새출발했다. 기존 중구 전동에 있던 공장도 부평구 청천동으로 이전했다. 이 시기까지도 막걸리는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가 많았지만, 산업화가 본격화하면서 소주와 맥주에 밀려 점차 입지가 좁아졌다. 정 대표는 “부평지역 위쪽에는 논이랑 밭이 많았는데, 밭에서도 농부들이 막걸리 말고 맥주나 마시자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양조장을 운영하는 사람끼리 ‘10년 이상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고민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이처럼 막걸리의 인기가 주춤했지만, 인천탁주는 사람들의 입맛을 다시 사로잡기 위한 고민을 거듭했다. 수많은 시도 끝에 1990년 업계 최초로 100% 쌀로 만든 막걸리 ‘소성주’를 출시했다. 마침 한류 열풍이 불며 전통주인 막걸리에 관한 관심도 함께 되살아났다. 정 대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1996년부터 인천탁주를 이끌고 있다. 그는 선대가 강조해 온 ‘품질 좋은 술’을 계승하기 위해 최신 컴퓨터 제어 시스템을 갖춘 자동 생산 시설 도입 등 현대화와 자동화에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다. 인천에서 ‘소성주’는 곧 ‘막걸리’를 뜻하는 단어로 통할 정도다. 인천시민의 꾸준한 사랑 덕에 인천을 대표하는 술로 자리매김한 인천탁주는 지역과의 동반 성장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소사이어티’ 50번째 회원으로 등록된 것을 비롯해, 지역 청소년에게 장학금을 전달하는 등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정 대표는 “인천시민들 덕분에 소성주가 사랑받을 수 있었고, 남들이 갖기 쉽지 않은 행운을 받은 만큼 지역 주민들에게 감사 표시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 대표가 한국막걸리협회장을 맡고 있던 지난 2021년에는 막걸리 빚기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다. 전통과 현대를 접목해 소성주를 문화 콘텐츠로 발전시키는 것, 그것이 인천탁주의 다음 목표다. 정 대표는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세 번째도 품질”이라며 “인천 대표 술을 만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끊임없이 연구하고 고민하겠다”고 다짐했다. ■ 농업 넘은 산업으로…식품업, 국민경제 주역이 되다 이러한 식품산업은 더 이상 ‘먹거리’에 그치지 않고 농업과 제조업, 유통·서비스업을 아우르는 융합 산업으로 성장하며 국가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1950년대 전쟁 직후에는 국민 기아 해소와 연관 산업 재건이라는 절실한 과제가 있었다. 1954년 통계청 통계연감에 따르면 당시 전국의 식료품공업 종사자는 1만867명, 사업체는 515개에 불과했지만, 이후 산업화와 도시화에 힘입어 기반이 빠르게 구축됐다. 1980~1990년대에는 냉장 유통 기술 발달과 대형 유통망 확장에 따라 가공식품과 즉석식품 수요가 폭증했고, 브랜드 중심의 대규모 식품기업도 성장 가도를 달렸다. 경인지역은 인구 밀집, 항만 물류, 산업 입지 등의 이점을 바탕으로 식품산업의 핵심 거점으로 떠올랐다. 대규모 소비시장과 제조 기반이 결합하며 자연스럽게 식품산업 클러스터가 형성된 것이다. 통계청 ‘식품및식품첨가물생산실적’에 따르면 경인지역 식품산업은 지난 수십 년간 압도적인 성장세 속에서도 꾸준히 전국 식품산업의 핵심 동력으로 활약해 왔다. 1999년 경기도의 식품 제조업 매출은 약 6조4천516억원으로 전국 1위를 차지했으며, 인천은 약 1조4천450억원으로 6위였다. 이후 성장세는 더욱 뚜렷해져, 2010년 경기도 식품 매출은 약 8조3천331억원, 인천은 약 3조3천862억원으로 크게 늘었다. 그리고 2023년 기준 경기도는 약 21조원으로 1999년 대비 3배 이상, 인천은 약 5조5천억원 규모로 4배 가까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이처럼 매출 규모가 수십조 원 단위로 급증하는 동안에도 경인지역은 전체 식품산업 매출(2023년 기준 약 75조5천억원) 중 약 35%라는 압도적인 비중을 꾸준히 유지해왔다. 이는 경인지역이 대한민국 식품산업 전체의 성장을 실질적으로 견인하는 심장부이자, 양적·질적 발전을 이끄는 성장 엔진임을 명확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에 발맞춰 경기도와 인천시는 산업 기반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경기도는 ‘2021~2025 식품산업 기본계획’을 수립해 전통주, 쌀 가공, 김치, 농가 가공사업 등 4대 분야를 육성 중이다. 특히 국산 농산물 사용 비중을 올해까지 59.1%로 확대하고, 농가의 농외소득도 2천500만원 수준으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인천은 지난 2023년 전국 최초로 ‘식품산업육성지원센터’를 개소해 관내 6만5천개 식품업체를 대상으로 HACCP 교육, 판로 개척, 마케팅 지원 등을 추진 중이다. 또 113개 업체의 상품정보를 담은 소개서를 제작·배포해 실질적 수출 연결에 나서고 있다. ■ K-푸드 수출로 본 식품산업의 미래 한국 식품산업의 세계화 흐름도 뚜렷하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기준 K-푸드 수출은 전년 대비 8.7% 증가한 81억9천만달러를 기록해 역대 최고 실적을 냈다. 라면이 연간 10억달러 수출을 돌파했고, 냉동 김밥·즉석밥·떡볶이 등 쌀 가공식품은 전년 동기 대비 41.9%나 증가했다. 미국과 유럽, 아세안 국가를 중심으로 한국 식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한류’와 ‘한식’의 결합이 실제 수출 성과로 이어지는 중이다. 하상도 중앙대학교 식품공학부 교수는 “식품산업은 광복 이후 인천항을 통한 원료 유입, 수도권 인구의 소비력, 서울 인근 제조업체들의 경기도 이전 등 복합적 요인이 작용하며 경인지역을 중심으로 뿌리를 내렸다”며 “앞으로는 K-컬처를 발판으로 글로벌 진출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특별기획팀 ● 관련기사 : ‘광복 80년’ 불굴의 도전… ‘기적의 경제’ 일구다 [지역경제의 개척자들] https://www.kyeonggi.com/article/20250303580243 80년 통계로 본 성장 궤적... 인재와 산업 몰려든 ‘경기·인천’ [지역경제의 개척자들] https://www.kyeonggi.com/article/2025030358023 정통 산업의 뿌리 ‘제조업’…경인지역 제조업 선구자 발자취 [지역경제의 개척자들] https://kyeonggi.com/article/20250330580237 지역발전 동반자 ‘건설업’… 대한민국 역사를 짓다 [지역경제의 개척자들] http://www.kyeonggi.com/article/20250429580267 사통팔달 ‘자동차 산업’… 경기·인천 꿈 싣고 달리다 [지역경제의 개척자들] https://kyeonggi.com/article/20250527580257 불모지서 싹틔운 전자산업… ‘기술강국’ 꽃피우다 [지역경제의 개척자들] https://kyeonggi.com/article/20250618580432

포항 노조 “사측 대화 의지 없어" vs 현대제철 "사업 구조 합리화로 생존 도모" [한양경제]

이 기사는 종합경제매체 한양경제기사입니다 현대제철 노조가 포항 공장에 대한 현대제철의 각종 조치들에 반발 중이다. 노조는 사측이 대화 의지가 없다며 협상장에 나올 수 있도록 지속 압박한다는 방침이다. 전국금속노동조합 포항지부 현대제철지회는 2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포항 공장 구조조정 반대 집회를 진행했다. 집회는 2인 1조의 피켓 시위 방식으로 이뤄졌다. 앞서 현대제철은 이번달 7일 포항 2공장에 대한 휴업 조치를 단행했다. 지난해 11월 2조2교대 근무 방식 도입으로 휴업 결정을 철회한지 약 6개월만이다. 현대제철 노조는 사측 결정에 즉각 반발했다. 포항 1공장 내 중기사업부 매각 진행과 함께 2공장 휴업 결정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현대제철은 실적 악화를 이유로 올해 중기사업부 매각을 결정했다. 노조는 현대제철 경영진이 포항 공장에 대한 투자 의지가 전혀 없다며 강도높게 비판했다. 사측에서 2공장 문을 아예 닫고 중기사업부를 매각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업황 악화를 이유로 적자 나는 부서를 없애겠다는 사측의 주장도 납득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지금까지 포항 공장을 통해 얻은 이익이 다른 사업장에 투자됐기 때문이다. 전봉구 전국금속노동조합 포항지부 현대제철지회 부지회장은 “현대제철이 국내에는 투자하지 않고 미국인들을 고용하며 기존 직원들은 줄이고 있다”며 “AI 시대가 계속되면서 기술이나 로봇 사업은 발전하는데 포항은 전혀 투자가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전 부지회장은 “포항 공장에 대한 구조조정 반대와 포항 공장 투자가 핵심 요구사항이다”라며 “현재는 회사가 칼만 들고 구조조정 하려고만 하지 투자를 전혀 안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경영진 측에서 대화 의지가 없다고도 주장했다. 노조 측이 현재 상황을 언론을 통해서 파악한데다 이후 조치들이 협의가 아닌 사측의 통보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전 부지회장은 “지금 시위는 노사 간에 풀어보려고 하는 건데도 회사 측은 전혀 반응이 없다”며 “서로 간에 논의를 해야 해답이 나올텐데 일방적으로 문닫겠다, 당진공장 가라 이러니 조합원들의 불만이 상당하다”고 답했다. 이번 시위를 통해서도 요구 사항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단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며 강하게 투쟁의지를 드러냈다. 전 부지회장은 “내부적으로 논의는 해야겠지만 할 수 있으면 단결권 투쟁으로 풀 것”이라며 “회사가 협상장에 나올 수 있도록 계속 압박할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노조 측 주장에 대해 현대제철은 “포항공장이 고비용 체제로 인해 구조적 한계에 직면했다”고 해명했다. 현대제철 관계자는 “경쟁력 강화와 고용보장의 측면에서 ‘선택과 집중’을 통한 과감한 사업 조정이 필요한 상황이다”라며 “전환배치 등 세부 실행 방안은 노조와의 대화를 통해 합리적인 방안을 도출할 계획이다”라고 설명했다.

토스뱅크 사고, 금감원장 부재 속 뒤숭숭한 금융권 [한양경제]

이 기사는 종합경제매체 한양경제기사입니다 은행권에 각종 금융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이를 감독할 금융감독원장 부재가 크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히, 그간 안전하다고 믿어온 인터넷전문은행(이하 인터넷은행)인 토스뱅크 사고가 발생하자 소비자들의 불안감은 커지고 있다. 하지만 이를 관리·감독해야 할 금융감독원의 수장이 현재 공석 상태라 불안감은 더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 자동 전산화 통한 ‘안전성’ 내세웠던 인터넷은행도 사고났다 24일 금융 관련업계 등에 따르면 토스뱅크에서 지난 5월30일과 6월13일 두 차례에 걸쳐 27억8600만원 규모의 횡령 사고가 발생했다. 재무조직 팀장인 A씨는 토스뱅크 법인계좌에 들어있는 회사자금을 본인 계좌로 이체하는 방식으로 횡령한 것으로 드러났다. A씨는 두 차례의 횡령 외에도 사측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수차례 추가 횡령을 시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토스뱅크는 5월30일 범행 이후 2주일 동안 횡령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다가, 이후 6월13일 2차 횡령 때 자체 모니터링 시스템으로 이를 발견했다. 법인계좌 잔액과 입출금 내역을 확인하는 잔액대사 과정에서 비정상적인 자금 이동이 발각된 것이다. 재무팀장으로서 결제 시스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A씨가 이를 악용했고, 그동안 문제없이 일을 처리해왔기 때문에 별다른 의심을 사지 않았다는 것이 사측 설명이다. 하지만, 내부 직원이 권한을 악용해 회사 자금을 손쉽게 빼돌리는데도 사전 예방은커녕, 보름 가까운 기간 이를 감지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내부통제 부실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업계에서는 사측의 이같은 해명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인터넷은행의 한 관계자는 “은행 명의 계좌 개설에는 관련된 복수의 유관 팀의 사전합의와 결재가 선행된다”며 “특히 회사자금 인출은 개인 계좌를 등록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바로 드러나게 돼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회사자금 이체를 하려면 재무 팀뿐 아니라 타 부서에도 보고가 올라가게 돼 있다”며 “토스뱅크 설명처럼 재무팀장이 혼자서 이체가 가능했다면 이건 시스템상 더욱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절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며 “앞으로 수사 진행 과정을 살펴봐야겠지만 공모 등의 연루자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전체적인 시스템을 점검해 보완책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며 “이번 사건으로 인터넷은행의 장점이 사라지게 됐다. 자동 전산화를 통한 안전성을 장점으로 내세웠는데 무색하게 됐다”고 말했다. ■ 금융 사고...만연된 ‘모럴헤저드’에 최고감독자는 부재 중 실제로 이번 사고로 인터넷은행 관계자들은 소비자들에게 신뢰를 잃는 점이 뼈아프다고 입을 모았다. 인터넷은행은 디지털로만 업무와 거래가 이뤄지는 특성 탓에 출범 직후부터 지금까지 보안과 내부통제를 장점으로 꼽아왔다. 이 때문에 인터넷은행에서 발생한 횡령사고는 규모와 관계없이 소비자가 체감하는 무게감이 시중은행 사고에 버금갈 수밖에 없다. 토스뱅크는 물론이고 인터넷은행 업계 전반에 대한 불신이 커져 소비자 이탈을 촉진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또 은행권 일각에서는 은행 자체의 개선안도 시급하지만 금융감독원 원장 인선 등이 우선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새 정부 출범 후 금융감독원 원장 인선과 관련해 여러 설이 돌면서 분위기가 어수선한 것은 사실”이라며 “아무래도 금융권을 감독할 최고감독자가 부재이다 보니 기강이 잡히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하루빨리 금융감독원에 대한 정부의 입장이 나오고 인선도 이뤄져야 금융권에 긴장감이 돌 것 같다”며 “산적해 있는 은행법 개정안 등도 빨리 처리되길 바랄 뿐”이라고 덧붙였다.

‘확 달라지는 은행 창구’… 시중은행 AI 속도전 '맞불' [한양경제]

이 기사는 종합경제매체 한양경제 기사입니다 과학기술부 장관에 배경훈 LG 인공지능(AI) 연구원장이 지명되면서 국내 4대 금융지주도 AI 내재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특히 은행 창구에서도 AI 기술이 접목돼 ‘AI 대전환’에 탄력이 붙을 전망이다. 배경훈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후보자는 24일 우리나라 AI 기술과 관련해 “분명히 저력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컴퓨터 인프라와 데이터가 보완된다면 세계적인 수준의 AI를 개발하고, 서비스 생태계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배 후보자는 인사청문회 준비단 사무실로 출근하며 기자들과 만나 이같이 밝혔다. KB·신한·하나·우리 등 국내 4대 금융지주는 정부의 AI 3대 강국 도약 목표에 따라 ‘AI 대전환’을 추진 중이다. KB금융은 지난달 금융권 최초로 그룹 공동 생성형 AI 플랫폼인 ‘KB GenAI 포털’을 선보였다. KB GenAI 포털은 KB금융지주와 8개 계열사가 협업해 AI 에이전트를 개발할 수 있도록 구축된 생성형 AI 기술 활용 플랫폼이다. KB금융 관계자는 “향후 3년 내 자산관리(WM), 개인금융, 기업금융 등 그룹 주요 17개 업무 영역에 걸쳐 90여 개 에이전트를 단계적으로 도입해 AI 전략을 실질적인 비즈니스 성과로 연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임종룡 우리금융 회장은 지난 18일 ‘챗GPT 활용 실습 연수’에 직접 참여해 “AI 기술은 리더가 더 나은 결정을 내리고, 더 나은 고객 경험을 설계하기 위한 도구”라며 “AI는 더 이상 특정 부서의 전유물이 아닌 전 임직원이 ‘모두의 AI’로 이해하고, 전략적으로 활용해야 할 새로운 언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연수를 계기로 ‘AI 대전환’ 추진에 더욱 속도를 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진옥동 신한금융 회장을 비롯한 신한금융 임원들은 지난달 23일부터 6주간의 일정으로 이수 중이다. 신한금융은 다음달 1일 하반기 경영포럼 ‘AX 신한-이그니션’을 앞두고 신한금융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한 임원들은 지난달부터 6주간 AI관련 교육을 진행 중이다. 아울러 포럼에서는 경영진들이 ‘AI Agent’를 담당 업무에서 활용하기 위한 미션을 수행하는 아이디어톤을 개최하는 등 리더십의 방향성과 그룹의 AI 실행력 강화 의지를 재차 다질 계획이다. 그룹 GenAI 플랫폼 구축을 시작으로 자산 관리(WM·PB), 보험 설계, 고객 데이터 분석 등 비즈니스 단위별 AI 에이전트 도입을 검토 중이다. ■ “창구서 보다 정확하고 빠른 서비스 제공 가능” 신한은행은 AI 기술을 적용한 미래형 영업점인 ‘AI 브랜치’를 지난해 11월 서울 중구 서소문에 열었다. 신한은행 AI 브랜치는 현재 활용 가능한 디지털금융 서비스에 AI 기술을 더해 구현한 미래형 영업점의 테스트 베드다. 주요 업무를 ‘AI 은행원’ 및 디지털 기기들이 수행한다. AI 브랜치를 방문한 고객은 AI 은행원을 통해 창구를 안내받고, AI 은행원 창구에서 계좌 및 체크카드 신규, 외화 환전, 제신고 등 업무를 처리가 가능하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AI 브랜치를 방문하는 고객에게 보다 정확하고 빠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며 “전문적인 상담이 필요한 고객에게는 더욱 집중적인 상담 서비스 제공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기존 디지털데스크와 달리 AI 은행원과의 대화를 통해 상담하고 업무를 처리할 수 있어 시니어 고객 등 금융취약계층도 쉽게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 지난달에는 신림동지점 AI 창구도 열었다. 이 지점은 입출금 창구 내점 고객이 많아 디지털데스크 화상상담창구 사용률이 높은 영업점으로 고객의 편의성이 크게 향상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디지털데스크·AI 창구·환전 ATM 등 효율적인 업무 연계를 통해 효과적인 업무 처리를 담당할 예정이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AI브랜치와 AI 창구는 신한은행의 디지털 전환을 가속화하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KB국민은행은 ‘금융상담 에이전트’를 고객·현장·직원 중심의 비즈니스 추진을 실질적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영업 지원 측면에서 생성형 AI 도입·활용해 준비 중이다. 자산관리 관련 PB 업무의 전문성을 향상할 수 있는 ‘PB 에이전트’와 기업대출 관련 RM 업무를 효율화·자동화하기 위한 ‘RM 에이전트’ 등 개발을 중점 추진하고 있다. PB 에이전트는 PB직원이 반복적인 수작업으로 작성하고 있는 고객·시황 분석 리포트, 포트폴리오 제안, 세일즈 스크립트 등 상담 자료를 자동생성해 고객 상담에 필요한 시간과 노력을 획기적으로 단축하고, 자산관리 상담업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하나은행은 지난 17일 직원용 AI 업무지원 플랫폼인 지식챗봇에 자체 개발한 생성형 AI를 전면 적용했다. 생성형 AI 기술을 내재화해 보다 지속 가능한 AI 기술을 활용하자는 취지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앞으로도 최신 디지털 기술을 금융서비스 및 직원들의 업무에 접목시켜 효율성을 높일 것이라”며 “이번 서비스를 기반으로 다양한 영역에서 생성형 AI 업무지원 플랫폼을 활성화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생성형 AI 플랫폼 개발 도입으로 본점·영업점 직원들의 업무 경감을 위한 은행 업무 자동화 구현도 계획 중”이라고 전했다. 우리은행은 임직원 업무용 ‘AI 지식상담 시스템’에 생성형 AI 기술인 ‘에이전틱 레그’와 ‘리즈닝’을 융합해 고도화했다. 이에 따라 규정과 절차, 상품정보 등 다양한 업무지식을 정확하고 일관성 있게 영업 현장에 제공할 수 있다. 특히 외부 솔루션에 의존하지 않고, 내부 기술역량을 활용해 보안성을 한층 강화했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정확하고 빠른 답변을 통해 직원들의 업무시간을 절약하고, 나아가 고객 만족도 향상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업계 관계자는 “Chat-GPT와 같은 생성형 AI가 급부상하고 있다”며 “기존 업무에서 AI 활용을 위해서는 개발과 운영에 전문 인력이 필요했지만 이제는 자연어를 활용해 은행의 현업 담당자가 자유롭게 업무에 AI를 활용할 수 있는 시대”라고 덧붙였다.

“희생 아니다”…MBK 홈플러스 주식 무상소각, 책임 회피 논란 가열

사모펀드 MBK파트너스가 홈플러스에 대한 2조5천억원 규모의 주식 무상소각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가운데, 이를 ‘희생’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법률상 요구되는 절차이자, 사실상 가치가 거의 사라진 주식을 정리하는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24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MBK는 지난 13일 입장문을 통해 “홈플러스는 인가 전 M&A를 추진 중이며, 이에 따라 MBK가 보유한 홈플러스 보통주는 전액 무상소각된다”며 “경영권을 포함한 모든 권리를 내려놓고 새로운 인수자의 인수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업계 안팎에서는 이번 무상소각 조치를 자발적인 책임 이행이라기보다는 회생절차상 당연한 수순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 제205조 4항은 회생절차 개시 원인이 이사나 지배인의 중대한 책임으로 발생한 경우, 특수관계에 있는 주주의 주식 중 3분의 2 이상을 소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법조계도 무상소각이 기존 지배주주의 경영권을 배제하고, 새 인수자가 안정적으로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라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더욱이 홈플러스의 기업가치가 크게 하락한 상황에서 주식을 소각하는 조치를 실질적인 책임 이행으로 보기 어렵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서울회생법원에 제출된 삼일회계법인 조사보고서를 보면 홈플러스의 청산가치는 약 3조6천816억원으로, 계속기업가치인 2조5천59억원보다 높은 것으로 평가됐다. 영업을 지속하는 것보다 청산하는 편이 재무적으로 더 낫다는 판단이 나온 셈이다. 이런 가운데 김병주 MBK 회장의 사재 출연 문제는 여전히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김 회장은 약 14조원(97억 달러)의 자산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재 출연과 관련한 구체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MBK는 지난 3월 입장문을 통해 “소상공인 거래처에 신속한 대금 결제를 위한 재정 지원을 마련하겠다”며 김 회장의 사재 투입 가능성을 시사한 바 있으나, 이후 실제 이행 여부나 규모는 공개되지 않았다. 정치권과 노동계는 김 회장을 향해 보다 명확한 책임 이행을 촉구하고 있다.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은 국회의원 시절이던 지난 3월 국회 정무위원회 현안질의에서 “김 회장이 1조5천억~2조원 규모의 사재를 출연하지 않으면 국민적 분노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홈플러스 노동조합 역시 “사재 출연의 구체적인 규모와 방식, 시기 등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며 투명성 부족을 문제 삼았다. 한편 최근 김 회장이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 소속 일부 의원들과 비공개 면담을 가진 사실도 알려졌다. 이 자리에서 김 회장이 1조원 이상 사재 출연 요구에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고 보도됐지만, MBK 측은 “사실무근”이라며 부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주주의 책임 회피 논란은 이어지고 있으며, 국회에서는 홈플러스 사태 해결을 위한 청문회 개최 결의안까지 발의된 상태다. 일각에서는 이번 홈플러스 사태가 MBK가 적대적 인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고려아연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홈플러스처럼 과도한 차입을 통한 LBO(차입매수) 방식이 적용될 경우, 인수기업에 막대한 부채가 전가되고 경영 부담이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임직원 고용 불안은 물론, 중장기적인 사업 경쟁력 저하와 미래 성장동력 위축 등 부작용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철도연구원 도시 트램노선과 일반 철도 무환승 이동가능 기술 마련

한국철도기술연구원은 트램·트레인의 국내 도입을 위한 핵심기술을 성공적으로 개발해 트램과 기존 철도노선 모두 안전하게 운행 가능한 기술 및 제도를 마련했다고 24일 밝혔다. 철도연에 따르면 트램·트레인은 도시 내 트램노선과 기존 철도노선을 자유롭게 오가며 환승없이 도심과 교외를 연결하는 차세대 친환경 교통수단으로 1992년 독일 칼스루에(Karlsruhe)를 기점으로 프랑스 파리와 영국 세필드 등 여러 도시에서 도입돼 이동성을 향상시키고 경제·문화적 통합을 촉진하는 등 다양한 효과가 입증됐다. 그러나 국가별·도시별 상이한 트램레일과 휠 및 이종 전력 공급 등으로 확장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가운데 철도연은 국내에서 사용되거나 도입될 모든 종류의 궤도(트램 전용 홈붙이 레일과 돌출형 일반 철도레일)에서 원활한 주행이 가능한 최적의 휠 프로파일을 개발했다. 또한 철도노선에서 트램의 안정적인 주행을 위해 탈선방지를 위한 안전 림 설계, 표준화된 중계레일, 급속선 주행 안정성 확보기술 등을 확보하며 트램·트레인의 안전성과 신뢰성을 향상시켰다. 특히 트램 전용선과 기존철도노선 간 원활한 전환을 위한 중계레일(Transition Rail) 및 전환구간 설계를 개발해 선로 간 충격을 최소화하고 탈선을 방지할 수 있도록 했다. 트램·트레인이 도심 내 급곡선에서도 안정적으로 주행할 수 있도록 인공지능 기반 휠·레일 모니터링 시스템을 구축해 실시간 주행 안전성을 분석하고 피드백하는 체계도 마련했다. 철도연은 이 같은 핵심기술의 실험 및 검증을 위해 세계 최초로 트램·트레인 전용 테스트베드 14.8㎞(트램 1.8km, 트레인 13㎞)를 철도연 오송 철도클러스터 내 철도종합시험선에 구축했다. 테스트베드는 트램·트레인 시스템의 안전성과 신뢰성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며 향후 차량 및 궤도 기술 검증을 위한 실험환경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이 기술을 적용하면 동탄신도시 집 앞에서 탄 트램으로 병점역에서 환승없이 기존 경부 철도노선을 활용해 서울역까지 갈 수 있으며 위례트램도 위례~신사선과 연계해 위례에서 신사까지 한 번에 갈 수 있는 등 도시와 교외를 잇는 무환승 이동이 가능해져 자동차 사용 감소 및 지역 균형발전을 유도할 수 있다. 기존 철도인프라를 활용한 트램운영이 가능해져 건설비 및 운영비 저감되고 승객에게도 무환승으로 통합요금제 적용이 가능해져 이용 편의성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연구책임자인 곽재호 박사는 “이번 연구로 이종궤도용 하이브리드 휠 개발, 급곡선 주행 안전성 확보, 중계레일 설계 등 트램과 기존 철도노선 간의 직결운행을 실현할 수 있는 핵심기술을 확보했다”며 “향후 지자체 및 관련 기관과 협력해 실증 사업을 추진하고 실용화를 앞당길 계획”이라고 전했다. 사공명 원장은 “국내 트램도입 및 활성화에 철도연이 앞장섰듯이 트램·트레인이 친환경 교통수단으로 자리잡고 환승없이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으며 지역 균형발전에도 큰 기여를 할 수 있도록 연구개발을 지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백정호 광주왕실도예사업협동조합 이사장 [지역경제 주춧돌, 중소기업협동조합을 만나다④]

“산에 오르기 전 ‘저길 어떻게 가?’ 해도 막상 가다보면 멀리 와있음을 알게 됩니다. 누가 저희를 끌고가는 게 아니라 누군가 저희를 따라오게끔 분주히 움직이는 조합을 만들겠습니다.” 지난 2월 취임한 백정호 광주왕실도예사업협동조합 이사장(58)은 “우리는 일단 한 발 나갈 것”이라며 이 같이 말했다. 조합을 발전시키겠다는 의지와 함께 광주의 자랑인 왕실도자기를 알리겠다는 다짐이었다. 그와의 인터뷰는 ‘달 항아리(Moon Jar)’에서 출발했다. 어떠한 무늬와 장식도 없는, 완전한 원형일 수 없고 비정형이라고도 볼 수 없는 세계적 예술품 ‘백자 달 항아리’가 경기 광주에서 탄생했다는 설명이었다. 백 이사장은 “조선시대 왕실과 관청에서는 경상도·전라도·충청도 등 전국 각지로부터 백자 등을 공급 받았다. 그때 질이 가장 좋고 우수하다고 평가됐던 게 (현재 달 항아리로 불리우는) 우리 광주 도자기”라며 “쉽게 비유하면 예전에는 특산물을 관리하는 기관으로 관요(官窯)와 사옹원(司饔院)이 있었는데, 도자기만 별도로 광주에 분원을 뒀을 정도”라고 전했다. 이어 그는 “달 항아리는 우리나라 고유의 멋이자 맛”이라며 “그 역사가 조선에서, 그 중에서도 경기 광주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가장 강조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도자기를 구우려면 가마가 필요하고 가마에는 땔감이 들어간다. 주된 땔감은 소나무였는데, 베고 자라기까지의 시간을 고려해 10년 주기로 분원이 옮겨다녔다. 그렇게 광주 이곳저곳에 왕실도자기와 관련한 ‘흔적’이 남게 됐다. 백 이사장은 “마지막 분원은 현재의 팔당댐 일대로 약 130여 년을 자리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소나무를 따라 옮겨다녔기 때문에 지금 광주 어디를 가도 가마터나 도자기 파편이 나올 수밖에 없다”며 “왕실도자기의 역사가 곧 광주의 역사”라고 했다. 수많은 자기와 수많은 생산지역이 있지만 그는 광주를 ‘종갓집’에 빗댔다. 하지만 왕실도, 관청도 존재하지 않는 오늘날, 왕실도자기를 일군 ‘종갓집 도예인’들의 고민은 깊기만 하다. 인테리어 소품용으로 상업화하자니 왕실도자기의 가치가 떨어질 것 같고, 왕실도자기의 역사성을 기리자니 수요가 낮아질 것 같은 딜레마에 놓여서다. 백정호 이사장은 “왕실도자기로서의 고품격, 고부가가치만 추구한다면 더이상 맥을 이어갈 수 없을 것”이라며 “이미 업계가 고령화 돼 있고 도자기를 찾는 수요도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앞으로는 ‘대중적’이면서도 ‘고급적’인 작품을 제시해야 한다는 게 우리 조합의 가장 큰 몫이자 숙제”라고 했다. 그는 이른바 ‘굿즈’처럼 임기 내 조합만의 브랜드 상품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꾼다. 백 이사장은 “과거에 비해 조합원사가 많이 줄어 지금은 37개사가 함께하고 있다. 다들 ‘먹고 살기 힘들다’지만 아무리 적게 팔리고, 선조들이 했던 것보다 인기가 없어도, 결국은 자기가 좋아서 이 일을 놓지 못한다”며 “조합 공동의 생산·제조 품목 등을 만들어 조합원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하는 게 저의 과제이자 바람”이라고 밝혔다.

애국심 발현 ‘건국국채’… 대한민국 탄생 밑거름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듬해(1949년) 우리나라 최초로 ‘국채법’이 제정됐다. 임시정부를 거쳐 새로운 대한민국이 자리잡는 과정에서 세입 부족·재정 적자를 타파하기 위한 방책이 ‘국채’였기 때문이다. 당시 국가 재건, 국방력 강화, 치안 유지에 목적을 두고 발행된 국채는 ‘건국국채’로 명명됐고 6·25전쟁 이후 폐허가 된 나라를 살리기 위해 대량으로 풀렸다. 호국의 탄환이 된 건국국채가 갖는 역사성과 가치를 조명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애국심 발현 ‘건국국채’… 대한민국 탄생 밑거름 지난해 12월, 장성숙 ㈔중소기업융합경기연합회 고문(73)이 작고한 큰오빠의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 큰오빠의 서재에 생전 아버지가 남긴 자서전 <나의 생활자욱>이 꽂혀있는 게 보였다. “30여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는 저희 가족에게 각자 2권씩 본인의 자서전을 주셨어요. 큰오빠도 보관하고 있던 거죠. 별 생각 없이 펼쳐봤는데 그 안에서 종이 봉투가 하나 나왔어요. 아버지 필체로 ‘건국국채(建國國債)’가 쓰인 봉투요.” 장성숙 씨는 조심스레 봉투를 펼쳤다. 그 안에는 자주색, 초록색, 주황색 등 손바닥보다 약간 큰 크기의 종이 수십장이 고이 보관돼 있었다. ‘오천원, 단기 4281년, 일련번호 D352768, 5년 만기, 연 3푼5리, 제2차 5분할 건국국채 증서, 재무부장관’, ‘일천원, 단기 4281년, 일련번호 A335075, 5년 만기, 연 5푼, 제4차 5분할 건국국채 증서, 재무부장관’. 그렇게 ▲오천원 2개 ▲이천원 4개 ▲일천원 10개 ▲일백환 6개 등 총 22장의 건국국채 증서가 나왔다. 장성숙 씨의 부친인 장래복 씨가 1952년 무렵 ‘5년 만기 연 3.5%~5% 이율’의 재무부 발행 국채를 2만8천600원(환 포함) 사들였다는 의미였다. “저희 아버지는 늘 ‘애국 정신을 가지고 살아라’, ‘국가와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 하셨지만 건국국채에 대해선 한 마디도 안 하셨어요.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1919년에 태어난 장래복 씨는 과거 인천시(당시 경기도 인천시)에서 제재소를 운영하다 건국 과정에서 ‘집’을 재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집을 지으려면 자갈·모래를 실을 트럭이 필요했기에 화물업에도 종사해 경기도화물자동차운송사업조합 이사장(1972년)까지 됐다. 중간중간엔 기와·벽돌공장도, 가구공장도 운영했다. “개인의 이익이 아닌 나라의 이익을 위해 살라고 하셨죠. 어려운 청소년, 힘 써주는 군인, 열악한 대한민국 환경 정비에 매진하시면서 ‘미래 우리나라가 먹고 살 게 없어지면 안 된다’고 다방면에서 갈고 닦으라고 하셨어요. 6·25전쟁 직후에 사들인 건국국채도 애국심이셨던 것 같아요. 큰오빠도 참, 이걸 혼자만 알고 있었다니.”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재무부에서 5년 만기로 냈던 국채, 이젠 국채법상 소멸시효 규정에 따라 원금 상환 및 이자 지급이 어렵다. 그럼에도 장성숙 씨가 아버지의 가슴 속 사무치는 건국국채를 꺼내든 이유는 하나다. “일흔이 넘은 저도 ‘이게 뭐지’ 했을 정도이니 자라나는 많은 분들은 더욱 건국국채를 모르실 거에요. 근데 아직 100년도 되지 않은 일이잖아요. 많은 분들이 광복 80주년에, 6·25전쟁 75주년에 건국국채를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금 모으기 운동처럼 ‘이런 게 있었구나, 이름도 흔적도 없지만 경제를 위해 애쓴 분들이 있었구나’ 하는 걸 알리고 싶었어요. 그거면 돼요.” 너도나도 ‘나라 살리자’… 전쟁 폐허 속 ‘韓 경제’ 기틀 마련 6·25전쟁 75주년을 하루 앞두고 돈 얘기를 꺼내보려 한다. 호국보훈과 거리가 멀 것 같은 국채·채권·주식 얘기다. 연관이 없어보여도 묘하게 맥을 같이 한다. 우리나라 국채·채권·주식이 사실상 건국 초기 ‘나라 재건’을 위한 ‘애국’의 일환으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특히 6·25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는 군수 물자 조달 등을 위해 국채 등이 대량 발행, 한국 경제 움직임의 기틀이 됐다. ■ 대한민국 출범과 함께 재정 적자…국채법 탄생 23일 기획재정부·행정안전부 등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채는 1949년 제정된 ‘국채법’에서 출발한다. 미군정 시기까지만 해도 통치 자금은 한국은행 차입금을 통해 해결했지만 재정적자가 누적됐고, 임시정부를 지나 ‘대한민국’이 새롭게 출범하면서 만성 적자에 직면했기에 ‘국채’를 통한 자금 확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국채법을 세운 후 세입 부족분을 보전하기 위해 처음으로 ‘건국국채(건국공채)’를 발행했다. 당시 국채발행요강에 따라 건국국채는 1950년부터 1963년까지 총 17회 발행됐다. 금액상 가장 적었던 건 제1회(1억환)였고, 가장 많았던 건 1958년 제11회(180억환)였다. 특히 6·25전쟁 발발 이후엔 국군 양병 및 군수 물자 조달을 위해 건국국채가 대량으로 발행됐다. 이 여파로 가치는 소폭 떨어졌으나 휴전(1953년) 이후 안정을 찾으며 다시 그 가치를 회복했다. 건국국채 제1~4회 발행분은 ‘2년 거치 3년 분할상환’이었다. 제5~6회는 ‘3년 거치 2년 분할상환’, 제7~9회는 ‘3년 거치 4년 분할상환’, 제10회 이후는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 등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상환 기간이 늘어나는 등 국채 발행 조건이 달라졌다는 건 실질적으로 국가가 ‘상환 능력’이 부족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럼에도 일부는 상환 등 조처를 취했다는 게 현재의 기획재정부 입장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건국국채 상환 혹은 보상에 대한 문의가 종종 국민신문고 등을 통해 들어오고 있다”면서 “건국국채는 1952년부터 1975년까지 총 98억5천300만원 상환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국채법상 원금 및 이자 상환에 관한 소멸시효가 규정돼 있었고, 해당 국채 증서상에도 상환 조건과 소멸시효 등이 명시돼 있었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는 최종 소멸시효는 만료돼 원금 상환 및 이자 지급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 “나라 세우게 돈 보태자”…채권시장 확대 건국국채를 사들인 이들의 상환 시점이 지나도 정부(당시 재무부·현 기획재정부)는 갚을 길이 없었다. 그야말로 건국국채가 ‘종잇조각’이었다. 그럼에도 정부는 여전히 세수 충당이 절실했다. 광복 및 전쟁 이후엔 ‘상장회사’라고 할 곳도 적었기 때문에 주식시장을 키울 수는 없고 유일한 수단이 ‘채권’ 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건국국채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터라, 새 금융 안정 대책이 필요했다. 그렇게 나온 게 ‘주택채권’ 등의 발행이었다.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애국의 일환으로 매도·매수한 채권들이 각종 폭등·폭락으로 연결되면서 국내 채권시장이 커지는 계기가 됐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외환거래 관련 세금을 확대하기도 했다. 그렇게 각 ‘지방은행’들이 태어났다. 1969년 창립한 인천은행의 경우 1972년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하며 경기은행으로 행명을 변경했다. 당시 인천이 경기도에 속해 있어서다. 정부 차원에서는 지방 경제를 육성하면서 자금을 선순환해야 했기 때문에 건국국채처럼, 주택채권처럼, ‘국가 주도 금융정책’의 일환으로 국민들에게 지방은행의 주식 매입을 독려했다는 전언이 있다. 장래복 씨의 경우 정부로부터 상환 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애국심’ 하나로 건국국채 등을 평생 소유했다. 그가 보관했던 ‘애국심’들은 ▲건국국채 2만8천600원(환 포함·1952년) ▲주식회사경기은행 및 주식회사한국상업은행 주권 51만5천원(1987~1993년) ▲제1종국민주택채권 8만원(1993년) 등이다. 당시 돈의 가치를 현재에 맞춰 환산하긴 어렵지만, 1962년 우리나라가 화폐개혁을 통해 1환을 10원으로 대체한 만큼 적어도 10배의 차이가 날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설탕 한 근(600g)이 160원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현재 5천원으로 가정해도 30배 이상의 차이다. 장래복 씨의 딸인 장성숙 ㈔중소기업융합경기연합회 고문(73)은 “어려운 시절을 딛고 경제대국이 된 우리나라의 이면엔 치안부터 경제까지 곳곳에 국민의 애국심이 묻어 있다”며 “아버지가 남긴 건국국채 등을 지역사회에 기증해 후손들이 건국 세대들의 애국심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하려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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