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경기신인문학상 시부문 당선작

가 을

노 동 효

올해는 내게 수음을 하느냐고 묻는 여자가 없었으므로 코스모스가 언제 피었는지 알 수 없었다.

눈을 뜨면 수십 개의 형광등은 동시에 켜지고 정오에 닿기도 전 풀어져 버리는 신발의 매듭

무덤의 도시에 가득하던 가랑잎이 이 거리까지 굴러오면서 내 정신의 퓨즈는 ‘퍽’하고 쓰러졌다

미망인이 된 이모는 밤마다 순결한 종이 위에 검은 꽃잎을 그려댔고

나는 그 정적 속에 깃 든 한 마리 어둠의 입자이고 싶어 온 몸에 먹칠을 하고

어둔 방에서, 그 어둔 방에서 홀씨들을 태웠다.

새벽미사에 나가는 누이는 자궁 속으로 거대한 갈고리를 집어 넣는 꿈을 없애 달라고 마리아에게 기도했으며

배꼽 위로 피어오르던 동백은 차츰차츰 시들어 갔다

나는 유서에 남기려 아껴두었던 단어를 붉은 일기장에 적고 말았고

누군가 젖은 어깨에 손 얹으며 당신이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면

그것은 유서를 쓰는 것이라고 대답했을 것이었다

몽유병에 걸린 그림자는 골방에 나를 쳐박아 두고 거리를 소다니다 돌아와

팔짱을 낀 연인들이 소름 돋게 했노라며 내 새끼손가락을 빨았다

사람은 결코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의 잠언을 확인하며 가을은 목을 잘랐고

그때 나는 거대한 칼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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