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여명기 선구자중의 선구자 근당(槿堂) 임기반(林基磐). 도산 안창호 선생의 10년 연배로 이웃동네에 살며 일찍부터 선각자의 눈을 뜨고 동고동학하며 일제침략에 대항해 민족계몽과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그의 민족혼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평생을 바친 선구자의 삶이 오랜기간 지하에서 잠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학계를 중심으로 독립협회, 하와이 민족계몽, 신민회조직, 국채보상운동, 조선독립청년단 조직, 독립 자금모금, 한국 재림 교회활동 등 그동안 잠들어 있던 애국활동이 베일을 벗기 시작하면서 그의 헌신적 일대기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본보는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삼육대 이종근교수의 논문을 통해 임창윤 서울치대교수, 임창열 경기지사의 조부이기도 한 임기빈 선생의 선구자적 삶을 재조명한다./편집자주
임기반의 호는 근당(槿堂)으로 1867년 5월5일 평안남도 용강군 양곡면 정화리에서 울진 임씨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형주(衡柱)이며 1904년 하와이에서 민족 계몽의 공을 쌓은 후 귀국 길에서 배운 진리로 한국 재림교회를 창설하고 자신의 이름 형주를 기반(基磐)으로 개명했다.
4살때 천자문을 전부 외고 할머니에게 이야기책을 읽어드릴 정도로 조숙했던 그는 14세 때에 벌써 한학의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십팔사략(十八史略)을 통독한 신동이었다. 소년시절 중국 고서에 정통하고 17세에 과거한 그는 한문학자요 유창한 언변가이며 장부였으며 이왕실에 한문습작을 가르친 일도 있었다.
임기반은 진사에 급제한 사람들의 지나친 주연과 매관매직의 피해를 보고 문벌타파를 주장했다. 사람이 태어날때 천부적 자유와 평등을 주셨는데 어떤 사람은 양반이고 어떤 사람은 천민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모순이라고 주장하며 양반의 신분적 우월성을 적극 배격하였다. 이것이 1880년의 일이니 가히 자유와 민권의 운동의 선각자였다. 19세때 그는 민족 개화를 부르짖고 색의를 장려해서 생활 개선을 도모하고 자력갱생으로 국난을 타개하자고 역설했다. 자신이 솔선 수범하여 백색 의복을 실용적인 현대의복으로 갈아입고 상투를 자른 후 계급을 타파해야 된다고 외치는 무리의 선두에 나섰다. 당시(1894) 이는 과히 혁명적 행동으로 보였고 그의 처신이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다는 조부의 힐책으로 고향 용강읍에서 쫓겨나 배고지(진남포 배화동)로 옮겨 살았다.
그는 투철한 국가관과 민족관을 소유했다. 당시의 부패하고 빈약한 정치풍토에서 민족 계몽운동을 전개하는데 철두철미했다. 특히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 청일 양군이 평양에서 교전하는 것을 목격한 그는 비분을 금할 수 없었다. 민족이 미개하고 국력이약해 이강토를 지킬만한 힘이 없어 남의 나라의 싸움터로 짓밟히는 수치를 보면서 나라를 살리는 길은 오직 민족의 힘을 키우고 국력을 배양하는 길뿐이며, 이러한 역사적 사명에 앞장서기로 굳게 결심했다.
이 민족을 개화시키고 교육시켜 힘을 단합시켜야 한다고 믿었던 그는 자신부터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고 당쟁과 부패 그리고 불화를 씻고 국민이 총화하기를 간절히 열망했다. 인격 개조와 국력 배양을 위해 서구 문화를 받아드려 민족성을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동시에 고향인 선돌감리교회를 설립하고 국민 계몽사업에 중점을 두었다.
임기반은 평양 독립협회 간부로 서정일신(庶政一新) 운동에도 적극 활약했다. 정부는 황국협회로 하여금 독립협회를 급습하게 하여 유혈사태를 빚었다. 정부는 사태수습이라는 명분으로 독립협회 간부들을 체포하고 황국협회와 독립협회를 동시에 해체했다. 이때 서재필은 미국, 윤치호는 중국으로 망명하고 이승만은 구속 투옥되었다. 이때 임기반은 중국으로 피신했다가 사태가 완화됨에 따라 다시 돌아왔다. 이것 때문에 그는 직간접적으로 정부의 주목을 받게 됐다./김창우기자 cwkim@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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