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엄익준씨

죽음 앞에는 장사가 없다. 인간이 자신의 죽음을 안다면 어떻게 될까. 대개는 의욕이 꺾여 자포자기할 것이다. 살아도 이미 사는게 아닌 것이다.

그러나 더러는 이에 초연한 삶이 있다. 이러한 당자가 개인업에 종사하는 사람일지라도 우러러 존경심을 갖게 된다. 하물며 국가대사에 관여하는 사람의 그같은 초인적 노력은 더 말할 것이 없다.

고(故) 엄익준 전 국가정보원 2차장이 이런 분이다. 간암말기 진단을 받고도 이를 숨긴채 남북정상회담에 관한 중대사를 음지에서 도우며 진통제로 고통을 견뎠다. 사표를 낸 것은 회담성사가 확정된 뒤인 지난달 8일, 일이 잘된 것을 확인하고 비로소 마음놓고 물러난 것이다. 뒤늦게 현대 중앙병원에 입원했으나 3일 오후 3시15분께 끝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고 말았다.

고인과 비슷한 분으로 약10년전 배석대법관이 있었다. 그 역시 간암말기 진단을 받고 미제사건을 줄이기 위해 밤새워 일을 더 열심히 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작고하기 보름전 사표를 쓸때 비로소 알았다. ‘현직에서 죽으면 조직에 누를 끼친다’며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어이 사표를 냈다. 배대법관 역시 그때의 나이가 고인과 같은 57세로 아까운 나이였다. 두분의 성품도 너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가히 순국의 공직자 상이다.

간암말기는 견디기 힘든 통증이 괴롭힌다. 고인이 회담 성사를 위해 남모른 뒷바라지를 하면서 겪었을 그 고통을 생각하면 정말 가슴 쓰리다.

평생이라 할 34년동안 몸담았던 국가정보원葬으로 오늘 삼성의료원에서 영결식을 갖는다. 삼가 명복을 비옵나니 고통없는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소서.

/白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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