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리부부가 우라늄의 방사능 연구로 라듐과 폴로늄을 분리하는데 성공, 원자핵 물리학의 선구자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것이 1903년이다. 소르본 대학 교수인 남편 피에르가 마차사고로 숨진 뒤에도 혼자 연구를 계속해 1911년엔 방사성물질량의 측정법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화학상을 또 받았다.
폴란드계 프랑스사람인 그녀의 딸 졸리오 퀴리도 역시 유명한 물리학자였다. 남편을 여의고 난 뒤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에 놓이자 주위에서 라듐연구에 관한 특허를 받도록 권유했으나 “학문을 돈으로 타락시킬 수 없다”며 끝내 거절, 학자적 양심과 자존심을 지켰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방사능 치료반을 조직하여 부상당한 군인들의 구호에 진력하기도 했다. 말년엔 방사능실험연구소 소장으로 여전히 연구에 골몰했다. 퀴리부인이 세상을 뜬 것은 1934년 그때 나이 67세였다. 오랫동안 방사성물질을 다룬 관계로 악성 빈혈을 일으켜 건강을 잃었던 것이다.
핵분열성의 상대성이론 확립으로 원자탄을 만들게 한 아인슈타인이 평화운동을 주창하였고, 이에 훨씬 앞서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해 폭약무기의 획기적 개발을 가져온 노벨이 인류평화와 복지를 위해 노벨상을 제정한 것은 아이로니컬한 일이다. 방사능 연구의 효시를 이룬 퀴리가 방사능 피해를 입은 군인들을 직접 진료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인류를 위한 과학연구는 엉뚱하게도 이처럼 인류를 위협하는 공포의 무기로 둔갑한다.
쿠니사격장의 우라늄탄 시비도 그렇다. 군사무기측면에서 보다 과학문명의 인류애적 양식에 비추어 판단되기를 촉구하며 기대하는 것이다.
/白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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