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소리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의 고사는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구(人口)에 회자된다. 군사적으로 압도적인 우세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우가 유방에게 패한 까닭은 무엇보다 성격탓이었다. 항우가 자신의 주장만 일삼고 고집을 꺾지 않는데 비해 유방은 언로(言路)를 열어 부하들의 의견을 경청했다.

진시황(秦始皇)에 이은 二世의 폭정에 견디다 못해 여기저기서 민란이 일어나던 진나라 말기 때의 일이다. 진의 운명은 풍전등화 같았다. 초왕(楚王)은 누구든지 먼저 진의 도읍 함양(咸陽·현 西安)에 진격하는 자를 그곳의 왕으로 봉하겠다고 공언했다.

함양에 먼저 입성한 사람은 유방이었다. 아방궁(阿房宮)에 들어간 유방은 말로만 듣던 진시황의 영화를 직접 목도하고 일말의 욕구를 느꼈다. 이런 낌새를 재빨리 눈치챈 강직하기로 이름난 부하 번쾌가 “아직 천하는 통일되지 않았습니다. 한시 바삐 밖에 나가 진을 치고 군사를 가다듬어야 합니다”라고 진언했다. 그러나 워낙 넋을 잃고 있던 유방은 듣지 않았다. 모사(謀士) 장량(張良)이 다시 나섰다.

“지금 당신같은 일개 서민이 이런 곳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천도를 무시한 진시황이 학정을 펴서 뭇 백성들의 원성을 샀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신은 먼저 원성으로 들끓고 있는 천하의 백성을 위해 상복으로 갈아입고 그들을 어루만져 주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하온데 금은보화에 눈이 팔리고 미녀에 넋을 잃는다면 진시황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옛말에도 ‘양약고어구(良藥苦於口), 이이어병(而利於病)이며 충언역어이(忠言逆於耳), 이이어행(而利於行)’이라고 했습니다. 제발 번쾌의 충언에 따르십시요.”

장량의 신언(愼言)을 듣고 유방은 지체없이 아방궁을 나와 언덕에 진을 치고 진의 백성들에게 약법삼장(約法三章)만을 발표함으로써 일거에 민심을 거둘 수 있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이 고사가 그리워지는 이유는 요즘 정국은 번쾌나 장량처럼 충언을 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淸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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