醉했나…

6·25한국전쟁에서 반격의 전기가 된 1950년 인천상륙 작전은 당초 10월로 예정됐었다. 한달 앞당겨 9월 15일 전격적으로 이루어진데는 맥아더 유엔군총사령관의 항공 시찰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는 나중에 “하늘에서 내려다 본 들녁의 벼가 누렇게 다 익어 상륙작전을 앞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고 술회했다. 퇴각하는 인민군의 보급차단을 위해 수확전에 결행키로 계획을 바꾸었던 것이다. 전쟁에는 언제나 이같은 비화가 있다. 전쟁 당시 미8군사령관을 지낸 밴 플리트의 외손녀로 육군회관서 열린 ‘위대한 장군 벤 플리트’한국어판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에이브리 라이더 미육군소령은 그녀의 할아버지로부터 들었다며 또다른 비화를 소개했다. 1951년 4월 중공군의 춘계대공세때 서울사수를 독려한 배경에 대해 공포의 폐허 속에서 연명키위해 한 할머니가 길거리에서 물건파는 것을 보고 그 할머니를 위한 심경으로 후퇴하지 않고 싸웠다는 것이다. 벌써 반세기 전의 일이다. 미국의회 연설에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뿐이다”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맥아더 원수는 1964년, 밴 플리트대장은 1992년에 고인이 됐다.

미국 대통령 부시의 대북 강경책에 대한 평가가 어떻든 그 배경엔 북한이 남침, 6·25전쟁을 일으킨데 대해 아직도 재발우려의 불신이 깔려있는 것은 사실이다. 6·25전쟁 직전에도 평양측이 고려호텔에 억류중이던 민족지도자 조만식 선생과 서울에서 붙잡힌 거물 공작원 이주하, 김삼룡의 교환제의를 해오는 등 위장 평화공세가 있었다. 이바람에 전쟁이 일어나는 날밤, 육군 수뇌부는 술파티로 곤드레 만드레 취해 있었다. 최근 논란이 된 송두율교수(독일 뮌스터大)의 한겨레신문 연재 칼럼에서 “이적성이 없어 문제될 것이 없다”는 이한동총리의 국회답변이 나와 또한번 들끓게 하고있다. 송교수가 로동당 서열 23위의 정치국후보위원 김철수의 이명동인으로 독일유학생을 북한에 끌어들이는 공작원인 것은 관계 당국이 알고있는 일이다. 북측 거물급 인사가 국내 신문을 통해 활동해도 처벌대상이 안된다니 나라가 어쩌다 이모양이 됐는지 알수 없다. 지금도 대북관계 개선을 모색하고 저들도 평화를 말하긴 한다. 이맘만은 못해도 6·25전에도 비슷했으니까. 권좌에 앉아있는 이들이 무엇에 홀려 취하지 않았나 걱정된다.

/白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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