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수

‘아동문학가 이원수(李元壽·1911∼1981)’는 잘 몰라도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로 시작되는 홍난파 작곡의 노래 ‘고향의 봄’은 남한은 물론 북한주민들도 아마 거의 다 알 것이다. 이 ‘고향의 봄’의 노랫말을 지은 이원수는 경상남도 양산 출신으로 1930년 마산상업학교 졸업 후 함안 가야금융조합에 근무하다가 상경, 1945년 경기공업학교 교사가 되었다.

이원수는 1926년 동요 ‘고향의 봄’이 방정환에 의하여 <어린이> 지에 뽑힘으로써 문단에 나와 윤석중 등과 <기쁨사> 동인이 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외형률 중심의 재래식 동요에서 내재율 중심의 현실참여적 동시를 개척하였다. 작품 경향은 초기엔 율동적이며 감각적이었으나 1940년대에 들어서 저항적 현실의식이 강하게 반영되었다.6·25 전쟁 이후에는 동요·동시보다는 동화·아동소설에 주력, 현실을 직시한 고발적 사실주의 아동소설을 발표하였다. 일제시대인 1935년에는 반일문학그룹에 연루돼 1년간 옥살이를 했었다. 그런데 이원수가 친일 시를 썼다는 주장이 나와 과거가 구설수에 올랐다. 일제시대 월간잡지 <반도의 빛> 1942년 8월호에 ‘지원병을 보내며’라는 한글 시를

발표했다는 것이다. 이 시의 4∼5연은 “나라를 위하여 목숨 내놓고 /전장으로 가시려는 형님들이여/부디 부디 큰 공을 세워주시오// 우리도 자라서, 어서 자라서/소원의 군인이 되겠습니다”로 돼 있다고 한다. 이 시가 게재된 월간지는 일제의 전쟁물자 조달을 담당했던 조선금융연합조합회의 국책기관지인데 발표시기를 보면 이원수가 가야금융조합에 근무할 무렵이다. “일제강점기와 6·25를 거치면서 일본과 공산당에 부역 안한 사람이 과연 몇명이나 되느냐 ”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어쨌든 예술인들이 자의든 타의든 친일작품을 남긴 것은 비극이다. 반일문학운동에 앞장섰던 이원수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고 1941년11월20일 쓴 윤동주의 <서시> 시구가 재삼 절절해진다.

/淸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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