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장)은 동 트기 전부터 꿈틀댄다. 새벽 3시. 성남 모란장은 전국 각지에서 물건을 싣고 올라온 상인들이 하나 둘씩 몰려들어 짐을 풀기 시작, 아침 햇살이 퍼지기 전부터 북적댄다.
아침 7시가 채 안돼 모란장은 어느새 손님을 맞을 채비를 끝낸 1천여명의 상인들로 꽉 들어찬다. 본격적인 난장이 시작되는 것이다.
‘난리법석 개(犬)판 오분전’
국내 최대 규모의 5일장인 성남 모란장의 겉모습은 그랬다. 사람사는 내음이 물씬나고 아우성치는 생동감이 넘친다. 그러면서도 그 시장안엔 나름대로의 질서가 흐르고 있다.
모란장은 4일과 9일로 끝나는 날에 선다. 장이 처음 생긴 것은 정확치 않으나 1960년대 초 성남대로변 곳곳에 노점상들이 난장을 펼치면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돼 1970년대에 광주대단지가 개발되면서 발전한 것으로 추측된다.
성남시 탄생 이듬해인 1974년 10월 한때 모란장 폐지 공고가 있었으나, 1990년에 버스터미널 뒷편 대원천 복개터 3천200여평에 새롭게 장터를 마련하면서 지금껏 이어져오고 있다.
모란장을 찾아 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않다. 지하철 8호선 모란역 사거리에서 내려 1Km이상 길게 멈춰선 자동차의 행렬, 불법 주차단속에 분주한 교통경찰들을 구경하면서 장바구니를 들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아주머니들의 잰걸음을 뒤쫓아 가면 어느샌가 모란장 입구에 도달한다.
시장 주변에는 모란장 유명세에 힘입어 ‘모란주점’ ‘모란노래방’ ‘모란식당’ 등 모란이란 상호가 붙은 점포들이 즐비하다.
모란장하면 떠오르는 것은 개고기와 고추. 화훼부·잡곡부·약초부·의류부·신발부·잡화부·생선부·야채부·음식부를 지나 모란장 끝편에 널찍하게 터를 잡은 애견부와 고추부는 모란장의 자랑중에 으뜸이다.
모란장상인연합회 전성배 회장은 “전국의 개고기와 고추값 시세의 70∼80%를 모란장의 물동량이 좌우할 정도로 모란장에서 개고기와 고추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고 말한다.
굳이 기자라는 신분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호기심이 발동해 ‘개잡는’ 광경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한국 토종 똥강아지의 무리가 웅크리고 잠을 자는 평화로운 모습만 눈에 띌뿐, 모란장 어디서도 개잡는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다. 아마 일부 외국언론의 개고기 비난 여론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꿩 대신 닭’이라 했던가. 개 대신 토끼와 꿩, 닭 잡는 모습에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토끼의 뒷다리 발목 가죽을 자로 잰 듯 자르고, 다음으로 궁뎅이를 지나 배 가죽, 그리고 목까지 스치듯 칼이 지나면 붉은 속살만을 남긴 채 가죽은 한개의 작은 ‘토끼코트’가 됐다. 그러나 기술자(?)는 기자의 고정관념을 깨고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건장하고 세련된 20대의 신세대 청년이었다.
이 모란장에는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엄청난 물품들이 꽉 들어차 있다.
개만 하더라도 집에서 키우는 애완용 고급견들을 빼고 식용 등 지구상의 모든 개들이 모여있는 박람회장 같다.
“이 놈은 서양갠데 크면 송아지만해져” “이 개는 일본의 진도개라고 불리는 ‘아키다’야. 15만원이면 싼 거야.”
장기에서 훈수꾼이 있듯, 개를 팔고 사는 곳에서도 의례 ‘감놔라 김노인과 배놔라 박노인’이 있게 마련. 노인의 구수한 입담이 군중들을 매료시켰다.
장날의 흥을 더하는 광대도 어김없이 출연(?)했다. 양손에 심벌츠를 들고 등에는 북을 메고 발에는 채를 연결한 끈을 동여맨 1인 오케스트라 광대는 ‘쿵짝쿵짝, 한번만 먹어봐 심장병·간장병… 다∼ 고쳐, 애들은 가라’고 떠들던 약장수를 연상시켰고 그옆에는 ‘친구’ 원숭이가 재주를 피며 거들었다.
그 예날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만병통치약 대신 옷가지를 싸게 팔고 있을 뿐, ‘그시절 그때를 아십니까’를 연상시키며 향수에 젖게 하는 것은 별반 차이가 없다.
“원단 자체가 실크야. 아무리 빨아도 달지 않고, 아무리 입어도 보푸라기가 없어. 물빨래, 세탁기 빨래 다돼. 이런 물건은 양복점에도 없어. 살려면 빨리 사….”
다소 과장된 듯 들리는 주인장의 입담이지만 정겹고 재밌어 너도 나도 웃음이다. 장에서는 웃음도 편안하다.
모란장에는 보고 살거리 외에 먹거리도 넉넉하다.
5천원만 내면 소주 한병과 돼지고기 안주를 충분히 먹을 수 있고, 말만 잘 하면 개구리 튀김 한접시는 서비스다. 또 직접 손으로 밀어낸 칼국수와 밥 한 그릇에 각종 나물이 나오는 보리감자밥도 일품이다.
그러나 모란장에는 상인회에 등록된 1천여명의 장꾼과 장터 귀퉁이를 비집고 좌판을 벌이는 500∼600명의 미등록 장꾼과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끊이질 않는다.
주로 바뀌벌레나 개미 퇴치약 등 간단한 물품을 파는 미등록 장꾼은 등록 장꾼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고, 기득권을 가진 등록 장꾼은 미등록 장꾼을 은근히 뜨내기로 취급한다.
평상시 모란장에는 평균 5만명의 손님이 찾는다고 한다. 이들이 흘리는 쌈지돈이 대략 30∼40억원 정도 된다고 하니 모란장의 시장 규모를 과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모란장을 찾는 주된 손님은 성남시민이 아니다. 80%이상이 서울, 인천, 수원 등 인근 도시에서 오고 멀리서 구경삼아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다.
성남시는 모란장을 국제적 민속 관광지로 육성하기 위해 남한산성 유원지∼모란장∼분당 신도시 서현역∼판교를 잇는 문화관광벨트를 조성할 계획을 갖고있다.
이를위해 모란장 서편에 민속공연장을 건립, 판소리와 도당굿 등 민속공연과 장을 찾는 서민들의 노래자랑 무대로 활용하고 있다. 또 투견·투계장을 설치해 장날마다 축제분위기를 고취시키고 고객들의 볼거리를 제공할 계획도 세웠다.
화장기 하나 없고 주름살이 가득한 노부들, 길 모퉁이에서 칼을 들고 손님을 유혹하는 식육점의 청년, 정품 고무장갑 3켤레에 1천원이라고 외치던 아줌마, 그리고 원숭이와 대화를 하던 아저씨의 진진한 얼굴들이 모란장의 주인공이다.
내일이면 다시 승용차들로 빽빽히 채워질 공간이지만 땅거미와 함께 어둠이 드리운 모란장은 닷새가 지나면 옆집 아줌마·아저씨같은 주인공들이 다시 나와 분주한 새벽을 열 것이다.
/고영규기자 ygko@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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