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강(沙江)에는 사강(沙江)이 없다.“고등어 꽁치 동태 대구 꽃게…, 전부 서울 가락동시장에서 사온 거여. 사강에선 피래미 한마리 구경할 수 없어”
어패류를 파는 한 노부의 말에서 사강장의 안타까운 현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 656-8번지 일원에 위치한 사강장은 2일과 7일로 끝나는 날에 장이 선다
사강장은 일제강점기 수원장·남양장과 함께 화성 북부장시권을 형성하며, 우(牛)시장과 소금, 어패류 등으로 유명했던 장터로 지난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문전성시를 이뤘다. 그러나 지금은 송산면과 인근의 마도면, 서신면, 비봉면에서 농사를 짓는 아낙네들이 내다파는 잡곡과 야채류만이 겨우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을 뿐 과거의 명성은 사라진지
오래다.
조수가 드나들어 ‘모래강(沙江)’이라는 명칭이 붙은 사강장은 인천을 오가는 배와 인근의 마산포와 대부도를 잇는 뱃길이 다았던 지역이다. 그러나 지난 87년 시작된 시화호 방조제 건설로 인해 바닷길이 완전히 끊어져 지금은 306번 지방국도만이 사강장으로 통하는 유일한 교통로가 됐다.
수원에서 서신면으로 가는 400번이나 990번 좌석버스를 타고 40분 남짓 달리면 비봉과 남양을 지나 사강에 도착한다. 사강의 옛 영광이 그리운 듯 정류장 주변에는 수십곳의 횟집이 들어서 있다. 그러나 이 곳에서 파는 다양한 종류의 횟감들은 인근 바닷가에서 직접 잡아 올린 것이 아닌, 인천 군산 목포 등 타지에서 사들인 이방어(異邦魚)들이란 한 횟집 주인의 말이다.
10분쯤 걸어 사강장 초입에 다달았을 무렵, 빈 장바구니를 든 한 아주머니에게 길을 물었다.
“사강장이 어디예요?”
“여기가 사강장인데 왜 그러슈. 황사바람 때문인지 장꾼들이 많이 않나왔네.”
“이게 다예요?”
“이게 다지 그럼, 뭘 바라나. 오늘은 손님들도 별로 없네.”
‘썰렁하고 난감하다’. 많은 것을 기대했던 탓인지 사강장의 첫인상은 실망스러웠다.
사강장은 한마디로 욕심없는 늙은 촌부들의 장이다. 장터에 나온 손님도, 손수 가꾼 장물(場物)들을 내다파는 장꾼들도 대부분이 70세 이상 고령의 노인들 뿐이다.
사강장은 그저 무료함을 피하기 위해 동네 노인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삼시 세끼 수척한 배를 채우기 위해 반찬거리를 장만하러 나온 사람들이 만나는, 그런 시골장이다.
“잘 벌어야 하루 4만∼5만원일까, 평소에는 2만∼3만원도 않돼. 그냥 소일거리나 하며 용돈이나 벌려고 나온거지 뭐.” 인근 마도면에서 밭농사를 지으며 냉이 달래 배추 열무 고추가루를 팔러 나온, 장꾼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소박한 김순옥(73) 할머니의 말이다.
김 할머니 주변에는 같은 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이웃 대여섯명이 나와 비슷한 종류의 물건들을 판다. 그렇다고 호객행위나 감언이설 따위는 없다. 오랜시간 알고 지내온 이웃 손님들과 100원 200원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는 맘씨좋은 흥정만이 있을 뿐이다.
사강장 한 켠 구석의 식칼, 부엌칼, 과도, 낫, 톱 등 ‘칼 갈어, 다 갈어’ 할아버지는 장사할 생각은 않고 대낮부터 소주 잔을 기울인다.
“××놈의 이 세상, ‘노가다’ 하루벌이도 않돼. 옛날엔 이러지 않았는데…” 실컨 혼자 넉두리를 하곤 이내 맨 땅에 쓰러져 곤한 낮잠에 빠진다.
악착같이 한 개라도 더 팔고 한 푼이라도 더 벌려는 선수(?) 장꾼이 사강장에는 없다. 그저 삶의 진솔한 모습이 묻어나고 인정이 피어나는 그대로의 모습이 남아있는 곳이 바로 사강장이다.
사강장은 산업화와 도시화, 새로운 교통체계의 형성 그리고 새로운 시장 기능의 탄생 등으로 점점 쇠퇴해가는 상태지만 아직까지는 미비하나마 지역 농촌주민들의 생활의 중요한 거점이 되고있다.
2일과 7일에 열리는 사강장은 독자적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다른 장들과 함께 하나의 시장권으로 형성하고 있다. 1·6일의 남양장, 3·8일의 오산장, 4·9일의 조암장, 5·10일의 발안장 등과 함께 화성시의 종합적인 시장권을 형성하면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사강장을 찾는 손님들은 대부분 송산면에 사는 1만명정도의 인구다. 여기에 인근 마도면과 서신면, 안산시 대부동의 일부를 합쳐 대략 2만명 정도된다.
그러나 시화호 방조제 건설 후 대부동 섬사람들은 시흥, 안산 등 대도시의 백화점이나 대형할인마트, 현대화된 재래시장으로 발길을 돌려 더이상 사강장을 찾지 않는다. 사강장의 장꾼들 입장에선 중요한 고객들을 인근 도시로 빼앗긴 셈이다.
이래저래 시화호 방조제에 대한 사강 사람들의 원성은 대단하다.
송산면 김길선 면장은 “시화호 방조제 건설로 가장 큰 손실은 사강 주변의 황금어장이 죽고, 천일염으로 유명했던 이 지역의 염전이 거의 사장돼 소금생산이 중단된 것”이라며 “이로인해 사강장의 기능이 급격히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사강장번영회 이영길 회장은 “바닷길을 막아 국토를 확장한다는 명목으로 건설된 시화호 방조제로 인해 연간 100∼200억 규모의 수산자원이 소멸, 결과적으로 지역경제의 파멸이라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했다”며 “넓어진 국토로 인해 얻어지는 논과 밭의 수획물들의 규모는 기껏해야 40억 수준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사강장은 1910년대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수원 우시장에서 소몰이들이 수십마리의 소를 몰고와 500∼600평의 대지에서 하루 300∼400마리가 거래되는 대규모 우시장을 형성했고, 7월 백중이 되면 사강장 상인들이 송아지 한마리를 걸고 씨름대회를 열었다. 또 4월 초파일에는 불놀이와 함께 20명쯤 되는 남사당패가 와서 줄타기 등을 하고 놀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지금은 노령화 및 마을 공동체의식의 붕괴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상인번영회 상인 20여명이 매년 정월 중순 농악놀이로 장을 돌며 축복을 기원하는 행사를 벌이고 있다.
“상인들이 설 땅이 없다”는 사강장 장꾼들의 긴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10년, 20년 후에도 장꾼들과 아낙네들의 흥정과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지만 조만간 잊혀진 향수로 기억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영규기자 ygko@kgib.co.kr
<사라진 사강의 우시장·소몰이 명수 홍사민옹>사라진>
“소(牛) 한마리당 500원에서 800원은 받았지. 사강에서 수원 우시장으로 소를 몰 때는 해뜰녘에 가서 500원을 받았지만, 오산 우시장에 갈 때는 주로 새벽 2·3시경에 출발해 800원을 받았어. 일종의 위험수당인게지. 지금이야 길이 뚫리고 밤에도 훤하지만 그 시절엔 밤에 산길·숲길을 지날 때 도깨비불이 나왔었거든.”
해방후부터 80년대 초반까지 번창했던 사강 우시장의 소몰이 명수 홍사민옹(81)은 “지금도 소 2∼3마리쯤은 너끈히 끌고 다닐 수 있을 것같다”고 말했다.
남양 홍씨인 홍옹은 사강 토박이다. 어릴적 증조부와 함께 살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는 것으로 보면 손자녀를 포함해 적어도 6대 이상을 사강리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일찍히 부모와 맏형을 여의고 5남매의 동생들을 데리고 사강리 일대 논 30마지기를 일구며 농사를 지었던 홍옹은 25세 되던 해, 빚 보증을 잘못서는 바람에 알거지(?)가 됐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소몰이. 해방직후 사강장은 수원장 및 오산장과 더불어 소(牛)시장으로 유명했다. 홍옹은 사강의 우시장은 인근 남양장과 발안장, 조암장의 소들이 모였던 곳으로 수원과 오산의 우시장보다 싸게 소값이 거래됐다고 말했다. 그는 가깝게는 수원과 오산, 멀게는 용인과 이천, 여주까지 소를 몰고 나가기도 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묵묵히 ‘소’마냥 일했어. 배운 것은 없고 가진 건 힘 밖에 없었으니 말야.”
홍옹은 ‘남 잘때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사강에서 새벽 2·3시경에 소 열댓마리를 몰고 나서 90리 길인 오산장까지 4∼5시간 걸어 이른 아침에 도착했다. 홍옹은 소몰이로 큰 돈을 벌기도 했다.
사강의 우시장은 현 사강장 버스정류장 부근의 새마을금고 자리에서 중소규모로 이뤄지다가 규모가 점점 커지자 60년대말 지금의 마을회관 부근으로 옮겨 거래됐으나, 지금은 소를 묶어맨 말뚝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그러나 “수원 소시장 장꾼들이 사강 소시장이 없으면 굶어 죽는다”는 말이 아직도 구전되고 있는 것으로 미뤄 볼 때 사강 소시장의 영향력이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306번 지방국도 옆 널찍한 2층 양옥집에서 부인 정명구 여사(75)와 6남매의 유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홍옹은 아직도 논밭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황소 열댓마리를 밧줄로 동여매 사강에서 오산으로, 다시 오산에서 수원, 수원에서 사강으로 끌고 다녔던 잊혀진 소몰이꾼 홍옹의 삶이 텅빈 사강장과 함께 역사속 저편으로 희미해져가고 있다.
/고영규기자 ygko@kgib.co.kr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