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왕릉

/淸河

고려의 마지막 34대 왕 공양왕(恭讓王·1345∼1394)은 이성계 일파의 손에 의하여 1389년 왕이 되었다가 1392년 이성계에게 쫓겨난 비운의 왕이다. 지난해말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왕릉골 마을에 있는 공양왕릉이 도굴된 것으로 알려져 큰 소동이 일었지만 나중에 도굴이 아닌 것으로 판명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공양왕릉은 고양과 강원도 삼척, 고성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어느 능(陵)이 진짜인지 모르는 채로 서로 공양왕릉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중이다. 먼저 고양시 왕릉골 마을 야산에는 공양왕과 왕비의 봉분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주위엔 조선초기 왕릉에 보이는 문인석과 무인석, 호석(虎石)이 자리잡고 있다. 1964년 국가사적 제191호로 지적됐다. ‘조선왕조실록’ 태종편에 ‘왕이 고려의 능을 찾으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고양에 공양왕릉이 있다고 보고하자 왕은 묘에서 능으로 승격하도록 지시했다’라는 대목도 유력한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최근 고양시는 비석 탁본에서 ‘고려공양왕릉’과 ‘공양왕순비릉’이란 문구를 확인했다고 한다.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의 공양왕릉은 특별한 석물없이 4개의 봉분으로 구성돼 있다. 이중 이 지역 유림에서 공양왕릉이라고 주장하는 봉분은 높이 6m, 둘레 30m로 다른 지역의 ‘공양왕릉’에 비해 월등히 크다. 강원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으며 매년 4월 유림에서 제사를 받들어 모시고 있다. 공양왕 유배지이며 사사지(賜死地)였던 ‘궁촌리’라는 지명에 나오는 ‘궁’은 왕을 상징한다는 점도 제시된다.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금수리 야산 중턱에 있는 ‘공양왕릉’은 높이 1.2m, 둘레 5m의 작은 규모다. 비석도 전혀 없으나 공양왕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홍문관 박사 출신의 함부열이 왕이 시해된 뒤 아무도 돌보지 않자 남의 눈을 피해 시신을 삼척에서 수습해 고향인 고성으로 옮겨와 모셨다는 이야기가 후손 사이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함부열의 후손들은 현재도 자신들이 왕씨 일가와 함께 이곳에서 제를 올리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한다. 공양왕의 비참한 최후를 말해주지만 한 사람의 묘가 세 곳일 수는 없다. 아무래도 고양시에 있는 능이 ‘공양왕릉’일 것 같다. 경기도의 문화재 당국이 3개 시·군과 함께 정밀조사를 실시하여 진짜 공양왕릉을 확정해야 하는데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지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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