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부전’은 작자 연대 미상의 조선시대 우의(寓意)소설이다. 아우 흥부는 착하고 형 놀부는 마음씨가 고약하다. 하지만 뒤집어 보면 또 다르다. 흥부는 착하기만 했지 무능한 게으름뱅이다. 놀부는 마음씨가 고약하지만 근검절약하고 의지가 센 생활인이다. 형의 분별력으로 보아선 방구들만 지기 일쑤인 동생이 미덥지 않아 아버지 유산을 나눠줄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특히 후반기는 상민에 대한 양반의 수탈이 심했던 시기다. 흥부가 다친 제비 다리를 고쳐주고 얻은 박씨로 인해 졸부가 된 것은 마음씨 착한 상민에게 막연하나마 꿈을 갖게하기 위한 것으로 보아진다. 반대로 놀부는 마음씨 고약한 양반으로 비유했던 게 ‘흥부전’ 작자의 의도로 해석된다.
현대 사회에선 흥부같은 건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다. 일할 생각, 노력할 생각은 않고 자신의 불행을 남의 탓으로만 돌리는 흥부형(型)은 설사 마음이 고와도 사회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에 비해 놀부는 다르다. 동생이 불로소득의 요행으로 얻은 재산가운데 화초장 하나를 얻어 땀을 뻘뻘 흘리며 가져 간 욕심쟁이지만 그것도 의욕이다. 지금도 양반같은 특수층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잘된 집안에선 잘되고, 어려운 집안은 역시 어렵긴 하다. 이른바 부익부, 빈익빈 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부익빈’하고 ‘빈익부’하는 상대적 사례 역시 우리들 주변에 수두룩하다.
권력 또는 금력 등 부정으로 축재한 이들도 물론 많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지금의 가진 층이 다 부정으로 재산을 모은 것은 아니다. 놀부같은 구두쇠형 근검절약으로 적수성가한 재력가는 우리 사회에 얼마든지 있다. 남은 모질도록 노력할 때, 자신은 흥부처럼 게으름만 피우다가 결국 돈없는 불행한 처지를 남이 빼앗아간 탓처럼 남을 저주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무책임이다. 가령, 게으름을 피운 게 아니고 뭣을 더 잘 하려다가 실패해 도산하는 지경이 되었다 하여도 그것은 남을 탓할 수 없는 자기 책임이다.
어려운 처지가 된 경위가 어떻든 간에 불행한 이웃들에게 사회가 되도록이면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건 물론 당연하다. 하지만 갖지 못한 불행이 마치 사회 탓인양 사회를 저주하는 빗나간 한(恨) 풀이는 심히 위험한 대상이다.
수백명을 죽게하고 다치게 한 대구 지하철 방화참사의 50대 범인 김아무개도 역시 이런 사람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병이 깊어 세상을 비관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신병이 깊은 게 세상 탓일 수는 없다. 이토록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칠 줄은 그도 미처 몰랐을 것으로 믿고싶다. 그저 깜짝 놀라게만 하고싶었을지 모른다. 무슨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지만 정신없는 것처럼 보일뿐, 정신이 없는 사람으로 여겨지진 않는다. 어떻든 정신 없는 사람이 아닌 정신있는 사람의 광기, 무작정 세상 탓으로 저주하는 맹목적 광기가 사회를 크게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여기엔 사회정서의 책임 또한 없는 건 아니다. 예컨대 걸핏하면 입으로 쏘아대는 ‘죽인다’는 소리, 그냥 욕지거리로 하는 말이지만 그같은 거친 언어의 남발은 생명 경시 풍조의 그릇된 단면이다. 사회정서가 이래서는 안된다. 우리는 좀 더 사회순화에 함께 힘써야 할 연대책임이 있다. 하나, 맹목적 저주의 광기는 그들 개별적 책임에 속하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흥부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가족을 먹여살릴 생각은 조금도 않은 위인이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사는 공식은 같다. 아무리 어려워도 노력하면 결국 끝이 보이게 마련이다. ‘나는 열권의 책을 놓고 무엇부터 먼저 읽을까 하고 고르는 시간에 남은 열권의 책을 다 읽는다’고 했다. 흥부같은 게으름뱅이에 놀부처럼 남의 호박에 말뚝박는 고약한 마음만 골라보탠 ‘흥부형(型)’ 놀부의 광기가 자제되어 사라지는 게 개인을 위하고 사회를 위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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