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칼럼/중용(中庸)의 힘

사형 폐지론자는 사형수의 눈물만 보고 말한다. 사람을 생매장해 죽였거나, 떼강도가 가족들 앞에서 성폭행 했거나, 돈에 팔려 여대생의 얼굴을 벌집처럼 총질해 죽인 범행 당시의 야차같은 상황은 외면한다. 사형 존치론자는 도저히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그들의 범죄만 보고 치를 떤다. 종교에 귀의한 사형수가 참회하거나 시신을 연구용으로 내놔 장기는 이식용으로 기증하는 등 다시 인간으로 돌아간 간절한 모습은 외면한다.

원래의 선한 인간과 악한 인간의 구분이 따로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같은 사람에게도 그 비율과 표출이 다를뿐 천사와 악마의 잠재성은 공존한다고 보는 것이 그간 보아온 경험법칙이다. 범죄심리학은 흉악범은 쫓길 수록이 그로 인한 초조함을 달래기 위해 더욱 위악(僞惡)적 행위를 자행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프로이트심리학의 정신분석은 인간에겐 위선(僞善)적 잠재의식이 항상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중용(中庸)은 유교에서 나온 말로 동양의 오랜 전통적 사상이다. 이 것과 저 것과의 중간으로 이도 저도 아닌 게 중용이 아니다. 이 것과 저 것을 다 흡수하여 용해하는 것이 중용사상이다. 칸트는 ‘이성이 인식의 한계를 넘어 추리적 형이상학을 이루는 것을 반대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인식의 한계를 명확히 하여 이성의 능력을 비판한 그의 ‘순수이성비판’도 알고보면 중용의 범주다.

고대사회의 동·서양에서 공자(孔子) 아류의 중용사상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론이 비슷하게 나온 것은 흥미롭다. 공자의 중용은 어느쪽에도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은 ‘중’(中)과 평상심을 뜻하는 ‘용’(庸)의 중용에서 ‘중’은 객관적 대상세계며 ‘용’은 주관적 자아세계로 일체를 형성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론 역시 그의 윤리학에서 중심사상을 이룬다. 예컨대 덕을 말함에 있어 마땅한 정도를 초과하거나 미달하는 것은 참다운 덕이 아닌 부덕으로 해석하였다.

이즈음 인간들은 예전같지 않은 생활탓인지 세상일에 한쪽으로만 치닫기를 좋아한다. 그러면서 강한 채 하지만 실은 약하다. 낚시에서 겉보기에는 단단한 끝대를 부러뜨리는 대어가 유연한 끝대엔 견디지 못하고 낚인다. 유연함이 단단함보다 더 강한 것은 탄력성 때문이며 이것이 곧 중용이다.

동·서양에서 비슷하게 제기된 중용사상이 서양에서는 별 볼 일이 없었고 동양에선 전래됐다. 그것은 서양은 개인주의가 강했던데 비해 동양은 집단주의가 강했던 탓이다. 그랬던 게 요즘의 우리들 역시 개인주의가 점차 강해져 중용의 관념이 퇴색해졌다. 이분법의 흑백논리에 치우쳐 내편이 아닌 세상 사람들은 적으로만 보려고 한다.

엊그제 극단적 양극화 현상을 배제하는 ‘반전·반핵 평화를 위한 시민 네트워크’모임이 36개 종교 및 사회단체 인사 등 5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있었다. 이 자리에서 강문규 지구촌나눔운동 이사장이 “시민운동의 생명은 몰(沒) 권력적·몰 시장적 입장에서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할 때만 유효한 것인데도

일부 시민단체들이 실수를 거듭하고 포퓰리즘의 경향에 휩쓸리면서 본연의 위치를 벗어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며 “중도적 입장에서 시민운동의 중심을 잡아 나가겠다”고 밝힌 것은 시대적 경구다.

시민운동만이 아니다. 이치는 경제활동도 그렇고 정치활동 역시 같다. 개인생활도 마찬가지다. ‘중용지도’는 세상사를 조화하는 근원적 힘이다. 이젠 첫머리에서 예를 든 사형제에 대한 개인적 입장을 답해야할 것 같다. 사형수의 참회도 그렇지만 법원의 오판(誤判)도 있을 수 있다. 집행엔 사면 등으로 아주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나 사회방어의 균형이 깨져선 안된다. 사형제는 선언적 의미로라도 두어야 한다. (완전)폐지는 아직 시기가 아니다

/임양은 주필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