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홍제동 집에서 바쁜 걸음으로 무악재 고개 넘어 영천의 전차 종점 언저리에 이른다. 벌써 공사판엔 이른 새벽부터 줄지은 샛 노란 얼굴의 군상들이 현장감독의 삽 배급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게으른 출근(?)으로 뒷줄에 처져 삽 배급이 끊긴 나는 그 날 하루를 공칠 수 없어 고양 신도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또 다른 공사장을 허겁지겁 찾았다. 거긴 일당제가 아니고 돈 내기식의 할당제였으므로 쉽게 일할 수 있었으나 돈을 거머쥐진 못했다. 며칠동안 내리는 비로 천막 속에서 먹고자는 한밥집의 밥값마저 대기가 어려웠다.
그 당시 부자들은 나에겐 저주의 대상이었다. 자본은 내몫을 빼앗아간 착취로 여겼다. 서울시의원선거 서대문구 제5선거구에서 갓 피선거권을 가진 스물다섯살에 출마했던 것은 나보다 앞서 입후보 등록한 채석장 사장 자본가의 당선을 막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 밑에서 저임금의 잡부로 뼈빠지게 일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선거구호는 ‘무산계급에서 나온 사람, 무산대중이 밀어 주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 힘은 달걀로 바위치기에 불과하여 돈키호테 같은 꼴이 됐다. 그 채석장 자본가는 시의원에 당선되어 서울시의회 의장까지 지냈다.
사회적 모순에 분을 참을 수 없었다. 진보당 사무실을 드나들기도 했다. 공산주의자가 되려고 자본과 노동에 관한 책자, 그 중에도 불온서적을 특히 탐독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가 되진 못했다. 잉여가치설의 모순, 수요에 의해 공급되고 능력에 의해 기여하는 계급없는 사회실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계급투쟁 논리가 얼마나 허구에 찬 것인가를 발견한 것은 그 당시 나에겐 절망이었다. 무엇보다 인성 말살의 혁명관은 현실 불만의 저주는 될지언정 미래적 가치기준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더욱 북의 공산주의는 일찍이 마르크스와 레닌의 원전이 경계한 전형적 수정주의자며 종파분자 집단에 속하는 김일성주의다. 저들이 차라리 공산주의를 한다면 남북관계가 훨씬 더 나을 것이다. ‘우리식 사회주의’의 주체사상으로 포장된 김일성주의로 인해 선뜻 개혁·개방을 못하는 데 오늘의 문제가 있다. 예컨대 일부 대학생들이 ‘민족공조’ ‘민족자주’의 어휘에 감춰진 저들의 혁명전략 차원의 전술적 개념을 모르고, 순수한 우리식 개념의 ‘민족공조’ ‘민족자주’로만 알고 동조하는 것을 보면서 철 없었던 나의 젊은 날을 생각해 본다.
더욱 걱정되는 것은 작금의 노동운동이다. 학생은 학생이니까 그렇다손 치더라도 기성사회의 노동계가 벌이는 지금의 노동운동은 사회파괴가 아니면 집단이기주의 지 노동운동이 아니다. 노동운동에 관한한 뼈저린 젊은 시절을 체험하여 비교적 좌파성향의 관대함을 지녀온 개인적 노력을 배신당한 감마저 갖는다. 노동운동의 발상기, 정착기를 지나 이제는 개화기에 접어 들었음에도 노동계는 아직도 발상기의 투쟁이론을 내세우는 것은 엄청난 시대 착오다. 자본과 동등한 노동의 신성한 생산가치를 잘못된 노동운동으로 인하여 자본의 우위를 생성케 함으로써, 노동의 권위를 떨어뜨린 책임을 현 노동계 지도부는 깊이 성찰해야 한다.
이른바 ‘노조귀족’들, 이들은 잘 먹고 잘 산다. 해마다 일선 노동자 노조원, 하위 노조 집행부를 불법의 아귀다툼 현장으로 몰고가는 이들의 선동은 부동의 만년 직업이 돼버렸다. 이 때문에 노조도 못만드는 숱한 일용직 진짜 노동자들을 비롯한 사회 저소득층의 삶만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나는 부끄럽게도 이 나이 되도록 살기를 잘못 살아 매월 돌아오는 카드빚에 쪼들릴만큼 여전히 가난하지만, 젊어서처럼 가진자를 저주하는 우매한 생각은 갖지 않는다. 그래서 자본을 턱없이 저주하여 핏대 높이며 거품 쏟는 ‘노동귀족들’ 입에서 그들의 위선을 나는 발견한다. 사회적 공감을 얻지 못하는 노동운동은 고독하다. 이미 국내 노동운동은 상당부분 고독해 졌다. 여기서 노동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오기가 아니고 반성이다. 설령, ‘노동귀족들’ 그들에게 어떤 불이익을 받는다 하여도 나는 물러서지 않고 자신 있게 반성의 충고를 거듭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임 양 은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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