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칼럼/노무현의 ‘才勝德’

노무현 대통령(이하 노무현 또는 대통령)은 위기 타개의 귀재다. 그로서는 황무지 같았던 정치 역정의 입신 과정에서 나름대로 터득한 생존 방식일 것이다.

귀재같은 돌파력은 자신의 측근비리마저 최대한 원용하는 상상불허의 놀라운 솜씨를 보였다. 도대체 청와대 총무비서관을 지낸 최도술이란 사람은 누군가. 이광재, 양길승, 이영로, 강금원이란 이름의 그들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최도술 비리가 불거지자 “눈앞이 캄캄했다”는 대통령은 재신임 카드를 불쑥 내밀었다. 이것이 노무현 스타일의 역공법이다.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이하 최병렬)는 노무현보다 선배이긴 하지만 단수는 아마 몇단쯤 떨어지는 것 같다. 재신임 카드의 낚시밥을 덜컥 물었던 최병렬이 뒤늦게 낚시인 줄 알고 낚시 바늘에서 빠져 나오는덴 한참 걸렸다. 상황은 대통령의 궁지 탈출에 이용당한 것으로 끝났다.

측근비리 특검법안의 거부도 그렇다. 대통령 입에서 (최병렬의) ‘협박정치’라는 말이 나왔을 때, 그의 머리엔 거부권 행사를 해도 좋겠다는 계산이 이미 서 있었을 것이다. 어떻든 특검법안은 떠났다. 정류장을 떠난 버스 뒷통수에 대고 항의하는 최병렬의 단식은 뭘 위해서인지 초점이 분명치 않다. 정기국회의 참여를 거부하는 전면투쟁이라는 것이 뭘 목표한 것인 지 알 수 없다. 공연히 국정을 발목 잡는다는 똥바가지만 뒤집어 쓰기가 십상이다. 이 또한 노무현식 노림수인 것이다. 최병렬이 아무리 배가 고파 기진맥진한다 해도 자신만 손해일 뿐, 체면을 세워줄 일이 생기기는 어렵다. 등원 거부에 명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역공의 암수에, 정공의 노림수에 이용만 당하는 제1 야당의 졸전은 실로 한심하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대해 퍼붓는 비난은 ‘의회주의 부정의 폭거’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뭐라고 해도 상관이 없다. 하지만 원내 투쟁이어야 한다. 장내가 아닌 링밖의 장외로 뛰쳐나간 선수에게 눈길을 돌리는 건 옵션이 짜인 프로레슬링 이외엔 없다.

꾀로 말하면 ‘꾀가 조조같다’는 속언이 있지만 꾀도 여러가지다. 그 중에도 잔재주와 큰 재주로 나누면 노무현의 재주는 임기응변에 능한 잔재주에 속한다. 잔재주도 재주이긴 하나 민중을 감복시킬 수는 없다. 그것은 언제나 미봉책이기 때문이다. 잔재주엔 또 말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그때 그때의 장합에 따라 임시방편으로 말을 둘러대야 하기 때문이다. 이래서 대통령이 말이 많으면 큰 정치를 펴기가 어렵다. 노무현이 이에 해당된다면 그래서 말이 많은 지 모르겠다.

대통령은 이를 알아야 한다. 측근비리의 의미를 몇몇 코드의 개인 비리로 덮어 씌우려 한다면 문제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다. 민중은 측근들 비리가 노무현과 어떤 관계이냐를 알고 싶어 한다. 민중의 이런 시각에서 보면 대통령은 죄인의 심정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한데, 조금도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큰소리 친다. 자신의 재주를 믿기 때문인 것 같다.

‘재승덕(才勝德)’이란 말이 있다. 재주가 덕을 이긴다는 뜻이다. 덕으로 대하지 않고 재주(요령) 피우기만을 일삼는데 대한 선인들의 경구다. 일상의 생활도 이러 하지만 치자의 경우는 더욱 새겨 들어야 한다. 국가사회가 왜 이리 혼란한가. 대통령의 말에 덕이 빈곤하기 때문이다. 치자가 지녀야 할 덕성의 덕목은 경륜과 신뢰와 친화력 등 세가지다. 이래서 덕이 있는 치자에겐 적이 많지 않지만 재주만 많은 치자에겐 적이 많은 법이다.

대통령의 편협증, 최병렬의 졸열성 이런 기싸움으로 인해 민중이 심히 답답해들 한다. 대통령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걱정할 것 없다’는 식이지만 민중은 나라를 무척 걱정한다.

덕성스런 대통령을 갖고 싶다. 큰 정치를 보고 싶다. 노무현에게 이런 대통령상의 변화를 기대하는 건 불가능한 것인가?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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