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2004년 갑신년을 맞이하는 감회가 비장하다. 2003년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국내외적으로 산적한 난제를 타결해나가야 할 현실이 중압감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새해 벽두에 미래를 설계하기에 앞서 과거를 돌이켜보는 것도 이에 연유한다.
지난 해는 한 마디로 사회는 안전 불감증에 빠졌고, 정치는 도덕 불감증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특히 당리당략에만 치우친 나머지 타협과 상생을 철저히 외면한 정치권은 경제, 사회, 교육 등 모든 분야를 마비시켜 국민적 지탄을 받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참여정부라는 기치 아래 개혁을 외쳤으나 취약한 정치적 기반과 국내외 난제에 봉착한 가운데 집권 첫해를 보냈다. 더구나 측근들의 비리 의혹으로 도덕적 기반이 흔들리자 “국민에게 재신임을 묻겠다”는 선언까지 했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해부하는 특검이 이뤄져 현대비자금 사건이 불거져 나왔고, 보통 정권말기에나 벌어지던 대통령 측근 비리에 대한 수사가 새 정부 초기부터 시작됐다.
신용불량자가 360만명에 달해 사상 유례없는 ‘신용위기’로 신용사회 근간이 흔들렸으며, 대구지하철 방화 참사는 우리 사회의 총체적 안전 불감증을 여실히 드러냈다. 특히 부안 핵폐기장 찬반 갈등은 결국 정부로 하여금 원전센터를 원점에서 재검토하도록 만들었다.
37년만에 귀국한 재독 사회학자 송두율 교수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 기소됐으나 송 교수 처벌을 놓고 보수와 진보 양측이 극한 이념 대립을 벌였다.
후세인은 잡혔지만 끝나지 않은 이라크 전쟁은 우리에게 심각한 문제점을 던져 주었다. 미국의 파병요청 이후 반전·반미운동이 전국을 달궜다. 북핵문제의 원만한 해결을 희망하는 정부와 정치권은 파병을 결정했지만 반대 주장이 수그러들지 않았다.
순탄치 않은 남북대화, 깊어가는 경기침체, 교육정책 혼선, 인권유린 문제, 행정신도시 건설 찬반, 농업국제화 등 그야말로 헤쳐나갈 격랑이 험난한 데도 검은 정치자금 수수를 둘러싼 정치권의 이전투구는 국민에게 절망을 안겨 주었다.
우리나라가 왜 이렇게 갈등과 반목의 늪에 빠져 있는가. 한마디로 서로가 가슴을 열어 놓지 않은 데서 기인된다. 걸핏하면 ‘역사가 평가할 것’ ‘역사의 이름으로…’라며 현재의 과오를 정당화하고 대중을 선동하는 권력층과 지식층은 이제 자숙해야 한다. ‘새시대’ ‘새정치’ 운운하며 유토피아적 공약과 슬로건으로 국민을 기만하는 위선의 정치는 바로 ‘열린 사회의 적’이다.
국가가 부강해지고 사회가 안정되려면 가장 먼저 화해의 정치가 이뤄져야 한다. 상호 이해와 양보, 대화와 화합을 추구해야 한다. 부패와 빈부격차, 사회적 차별이 해소되는 전환점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기만, 내 편만 잘 살겠다는 집착과 욕망을 버려야 한다. 남과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넓은 마음과 올바른 생각을 가질 때, 그리고 그 마음을 실천할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보다 밝아지고 행복하게 된다. ‘열린 세상, 열린 이웃’은 새로운 마음의 눈을 뜨고 집착과 대립, 독선의 어둠을 버릴 때 다가온다.
지금 우리 앞에는 4·15 총선, 남북문제, 경제회생 등 실로 중차대한 국가 사업과 민생 현안들이 중첩돼 있다. ‘열린 세상, 열린 이웃’이 활짝 펼쳐지는 가운데 구태연한 정치의 틀과 낡은 인습을 완전히 깨뜨리는 한해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해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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