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아일랜드는 300년 만에 압박을 벗었고 유대 민족은 2천년을 나라없이 떠돌아 다녔으나, 그들은 민족의 전통을 상실하지 않았다. 우리가 불과 35년으로 이 지경까지 타락했다는 것은 단순히 친일자들의 수치로만 끝날 일이 아니다. 민족 전체의 수치로서, 맹성은 물론 환골탈태의 결사적 고행이 수반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청산이 아니라 오히려 온존된 일제의 잔재는 이 땅의 구석구석에서 민족의 정기를 좀먹었고, 민족의 가치관을 학살하였다. 이 흙탕물을 걷어 내지 못하는 한 민족의 자주는 공염불이요, 따라서 민족의 통일도 백일몽이다”

일제하 친일문제 연구로 친일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임종국 선생이 1989년 11월12일 60세로 작고하기 전 남긴 원고 중 한 대목이다. 임종국은 경남 창녕 출신이다. 고려대 정외과를 졸업했지만, 문학에 뜻을 두어 시와 문학평론으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1956년 해설을 곁들여 그가 엮은 ‘李箱全集’은 이상 연구의 선구적 업적으로 꼽힌다.

임종국의 친일문제 연구는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친일문학론’(1966)으로 점화한 그의 친일 연구는 ‘일제 침략사’(1984), ‘일제 하의 사상탄압’(1986), ‘친일논설선집’(1987), ‘일본군의 조선침략사’(1988)등으로 이어져 친일파와 그의 친구들이 권력과 여론 시장을 틀어쥔 한국 사회에서 민족적 자의식을 일깨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임종국의 작업은 일본제국주의의 법적 부정을 바탕으로 세워졌으면서도 실제로는 일제 협력자들의 손아귀에 붙들려 있는 대한민국의 분열증적 상황을 진단하고 치료하려는 노력의 시발점이었다. 임종국의 유지는 민족문제연구소(이사장 조문기)의 ‘친일인명사전’ 편찬 등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지금 문학평론가 임헌영 중앙대 교수가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임소장은 “친일 청산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다. 친일 문제 청산 없이는 정치개혁도 불가능하고, 온전한 의미에서의 동아시아·세계평화도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할 일이 참으로 중차대하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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