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심경을 착잡케 만든 또 하나의 ‘큰일’이 발생했다. ‘여호와의 증인’ 신자로 종교적 이유를 앞세워 군 입대를 거부한 2명의 청년과 예비군 훈련을 거부한 1명에게 법원이 21일 무죄를 선고한 일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 병역법상 입영 또는 소집을 거부하는 행위가 오직 양심상의 결정에 따른 것으로 소명될 경우에는 정당한 사유에 해당한다. 양심의 자유는 국가가 개입해서는 안되는 내적 자유는 물론 이같은 윤리적 판단을 국가로부터 강요받지 않을 자유도 포함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한해 600명 안팎인 병역 거부자는 연간 징병인원 30만여명의 0.2%에 불과해 국가방위력에 미치는 정도가 미미하다. 대체복무와 명확한 기준을 마련한다면 고의적 병역 기피자를 충분히 가려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법리적으로 판단하였겠으나 이는 ‘국가의 안보문제는 개인 양심의 자유에 앞장선다’는 기존 관념을 깨고 헌법상 양심의 자유를 최우선으로 해석한 첫사례여서 향후 병역 문제는 물론 법체제에 대한 뜨거운 논란이 예상된다. 우선 민주주의 기초가 되는 정신활동의 자유를 국가권력이 침해할 수 없다는 취지를 분명히 한 것은 공감한다. 그러나 대체복무와 명확한 기준이 마련된 뒤 무죄를 선고했어야 옳았다. 통일한국이라면 몰라도 체제가 남북으로 갈린 상황에선 아무래도 판결이 시기상조라는 얘기다.
이번 무죄판결은 병역의무를 다하는 대다수 국민들과의 형평성 문제와 함께 종교 외의 정치적 신념 등에 따른 병역 기피자들에게 영향을 줄 게 명약관화하다. 현재 ‘여호와의 증인’ 국내 신도수는 모두 9만500명으로 이 중 입영통지서를 받는 대상자는 연 평균 700여명으로 이들은 ‘무기를 들 수 없다’는 교리에 따라 거의 예외없이 병역을 거부하고 있다. 종교를 개종하고 입대하는 경우도 있지만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병무청이 병역거부권을 종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인정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은 당연하다. 남북이 첨예하게 대치하는 안보환경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한다면 병역의무 이행의 기본질서가 와해돼 국가존립 자체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 특히 이번 판결 이후 종교를 이유로 병역을 거부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확산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양심’을 합법적인 병역기피 수단으로 악용할 소지가 다분하다. 너도 나도 ‘양심의 자유’라는 모호한 개념을 들고 나온다면 군대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종교적인 신념을 이유로 군 입영 대신 대체복무의 길을 열어 두면 병역 거부자들이 급증해 병역제도의 근간이 무너질 게 우려된다. 유사시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군복무자와 사회봉사를 위주로 하는 대체복무자는 확연히 다르다.
‘위장 신자’들이 늘어날 개연성도 농후하다. 실제로 국방대학원이 2002년 군에 다녀오지 않은 10~20대 남성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조사대상의 33%가 대체복무제를 시행할 경우 여호와의 증인으로 개종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이들 중 12%는 완전 개종 하겠다고 응답했으며, 입영 전에 여호와의 증인으로 개종했다가 대체복무를 마친 뒤에는 다시 원래의 종교로 돌아 가겠다고 응답한 사람이 9%에 달했다.
무엇보다 걱정스러운 것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병역을 거부하는 정당한 이유’로 간주한 만큼 종교적 이유 뿐 아니라 ‘개인의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도 인정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란 사실이다. ‘양심적 병역기피자’와 ’비양심적 병역복무자’로 극명하게 나눠질 지도 모른다. 병역문제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기우라면 천만다행이겠지만 부도덕한 정치인, 경제인 등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나는 양심에 따라 행동하였으므로 죄가 없다”고 ‘양심의 자유’를 주장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처리하겠다는 것인가! 앞으로 있을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대통령 탄핵 여부 판결만큼이나 예의 주시된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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