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 고산族에 고구려 흔적이…
인생 행로는 단정할 수 없는 미로다. 우리는 늘 준비없는 미지의 길을 떠나 무모한 열정을 수단으로, 마치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처럼 씩씩하게 돌진하는 것이다. 되돌아볼 시간의 편린마저 깨부수고, 원점으로의 퇴로마저 찾을 기회조차 놓치고 마는 삶의 궤적. 그 숨가쁘게 달려 다다른 목적지는 결국 죽음이라는 종착역이 아닌가.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인간 도정을 탐구하며 빠르게 달려 여행은 가볍게, 추억은 두껍기를 갈망하는 모순 속을 방황하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꽃의 도시, 봄의 도시, 수많은 소수 민족의 다양한 삶이 있는 중국의 서 남방 곤명과 베트남 북부 사파의 고산족 마을을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길의 향방이 얼마나 많은가. 지난 겨울 앙코르와트를 떠나오며 다시 오기 어려울 것이라고 아쉬워했던 것이 이번 여행에 포함된 것처럼, 언젠가 나의 알 수 없는 인생 여정이 그곳으로 이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이 또한 나의 길에 놓인 수많은 선택과 회귀의 시간이 도와줄 때만 가능한 일이겠지만….
카오산 로드와 방콕
카오산 로드에 도착하니 새벽이 가까운 밤이다. 빈방을 얻기도 그렇고해서 8명이 한방에 투숙하는 모라토리에 불을 켰다. 양쪽 2층 침대에서 형광등 불빛이 눈부신 듯 눈을 가리며 이방인들이 꿈틀거린다. 모두들 짜증스런 표정인지라 고양이 걸음으로 살금살금 문을 여닫고, 양치와 샤워를 한후 비어있는 침대 맨 밑칸에 들어가 누웠다. 그러나 모기가 어찌나 많은지 연신 면상을 때리자 손에 핏물이 찍히곤 했다. 엄청난 더위에도 어쩔 수 없이 침낭 속으로 들어가서 방어의 폭을 안면부로 좁힌 상태지만 그들의 빠른 스피드를 감당하지 못한채 억울한 헌혈을 하고 말았다.
날은 밝아오고, 오늘 밤 치앙마이를 가기전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카오산 로드와 미술관을 돌아봤다. 미술관에서 본 태국의 문화 유물들은 화려하고 규모는 크지만 왠지 감동은 적다. 세번째 오는 방콕은 올 때마다 답답하다. 교통이 그렇고, 다양한 인간들이 넘쳐나는 것, 그리고 날씨다.
카오산 로드는 이번이 처음이다. 노도같은 젊은 군상들이, 쫓겨난 내 청춘의 불타던 이상을 한없이 가엽게 한다. 노천에 둘러앉아 맥주를 마시는 반 벌거숭이 젊은이들의 모습에서 부러울 것도 없고, 부족한 것도 걱정 없는, 무한한 자유와 자신감이 느껴진다. 잃어버린 시간들의 갈증은 더욱 가중되고, 결국 나는 길가의 포장마차에서 시장아저씨 같은 폼으로 국수 한그릇을 사 먹는다. 태국의 국수, 특히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카오산 로드의 팟타이(말린 국수를 다시 익힌 1mm정도의 찰진 느낌의 볶은 국수)는 싫다. 큰 알루미늄 통이 얹혀진 손수레에 어묵, 고기, 채소 등을 골라서 주문해 먹는 쿠웨이 티아오가 내 입맛에 맞는 담백한 물국수다. 한그릇 주문했더니 K선생과 N선생이 덤빈다. 뜨끈하고 구수한 국물이 그녀들의 식도를 타고 급히 내려가며 조용한 변주의 소리를 낸다. ‘꼬르륵…’.
치앙마이
방콕에서 12시간을 달려 도착한 치앙마이의 새벽, 고산족 마을을 가기위한 산악 지대로의 트레킹을 시작한다. 50세부터 가족에 대한 통치력을 잃었다는 대구에서 온 방태표 선생은 경상도 사투리를 씩씩하게 구사하며, 그 높고 깊은 등반 길을 가볍게 합류한다. 산은 점점 가파르고 거칠더니 눈앞에 커다란 폭포가 닥친다. 더위에 지쳐 배낭을 내팽개치고 땀을 닦는 순간, 방선생이 갑자기 옷을 벗더니 하얀팬티 차림으로 폭포로 돌진한다. 참으로 용감한 방 선생의 존함 또한 위태롭다. 이름 가운데 자가 ‘태’자였기에 망정이지 ‘대’자였다면 나의 룸메이트로 굳혀져가는 그에게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는 처지 아닌가. 잠시 후 이번엔 방선생의 돈키호테식 입수에 격분한 노처녀 K선생이 여기가 무슨 와이키키 비치라도 되는 양 비키니차림으로 폭포 속으로 뛰어 든다. 물살은 엄청나게 차갑고 등줄기가 찢어지는 듯 낙차가 강하다. 뒤늦게 도착한 서양 배낭족 무리는 우리를 가소롭게 바라보더니, 옷을 아슬아슬하게 모두 벗어 던진다. 그들이 남녀노소 혼탕에 한참 즐거워라 놀 즈음, 우리는 또 다시 길을 재촉한다. 이윽고 도착한 고산족 마을은, 재래종 돼지와 토종닭들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넘치는 자유를 방종하며, 이방인들을 환영하듯 뛰어다닌다. 여장을 푼 방선생이 갑자기 돼지 바베큐를 제의한다.
‘좀 큰놈으로 해야 제, 작은 놈은 얄팡거려 못 묵는다.’ 그리고 중 돼지 한마리를 지목했는데 우리나라 잡종 돼지로 치면 새끼다. 마을을 한 바퀴 돈다. 디딜방아에 곡식을 찧는 모습과 베틀 위에서 옷감을 짜는 여인도 보이고, 아이들의 노는 모습도 우리의 어린 시절과 같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이들이 고구려의 유민이라고 하던 어떤 학자의 주장이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가옥은 대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만들어졌다. 지붕은 커다란 나뭇잎을 우리나라 너와집 형태로 만들었는데 나뭇잎을 거꾸로 이어 만든 것이 특이했다. 마을을 한바퀴 돌고 계곡의 울창한 밀림에서 상큼하게 산림욕까지 하고 돌아오니, 불타는 장작더미 위에 매달린 돼지가, 이방인의 입가에 미세한 미소와 함께 양질의 분위기를 제공하고 있다. 방사한 돼지라 엄청 질겨, 굽고 또 구워 보지만, 온통 손에 기름 범벅이고 생각보다 맛은 떨어졌다. 촛불이 놓인 나무식탁도 좋고, 하늘의 별빛도 내 곁에 내려와 있다. 그 어떤 호사스러움도 절대로 부럽지않는 운치에 사뭇 도취되어 있을 때, 소주 몇잔에 흥분한 방선생이 한 곡 뽑는다. 그는 스스로를 ‘이름 없는 별’이라고 우아한 은유적 닉네임을 정했다.(나는 그의 닉네임을 줄여 ‘별’이라고 정했다.)
고산족의 젊은 안내자는 사랑하는 여인을 그리워하며 정말로 슬픈 듯 애절한 노래를 불러댄다. 그가 흠모하는 여인은 치앙마이의 고급 관료의 딸인데, 자신의 신분으로는 어찌할 수 없어 속앓이를 하는 것이었다. 모닥불이 스러질 때까지 고산족 마을 사람들은 춤과 노래로 답례하며 즐거워한다. 그들은 우리의 소주 맛과 인정에 감동한 듯, 이렇게 재미있게 놀아보긴 처음이라고 했다. 전기가 없는 오지에서 촛불 마저 수명을 다하고, 차가운 마루방을 더듬어 잠자리에 든다. 밤 공기는 쌀쌀하고 가끔 천장의 틈 새로 검푸른 하늘의 별이 스친다. 인생 항로가 얼마나 오묘하여 나는 이 치앙마이의 고산족들과 함께 천지가 맞닿은 외로운 밤을 잠재우고 있는 것일까.
고산족 마을을 작별하는 아침. 그들은 우리를 향해 일제히 손을 흔든다. 산중의 인정은 더욱 깊다. 굴참나무가 있는 밀림을 헤쳐 나가며, 무거운 배낭을 메고 굽이굽이 산길을 탄다. 방선생의 이야기에 힘든 것을 잊는다. 그의 이야기중 뱀 잡는 법과 산불 끄는 법은 무척 진지하고 섬세했다. 뱀을 보면 삼베조각을 내밀어 그것을 물게한 다음, 확 잡아채면 뱀의 이빨이 모두 빠지는데, 그때 손으로 주워 담는다고 했다. 신빙성은 확인할 수 없지만 땅꾼 전력이 있지않나 의심스러웠다. 얼마를 걸었을까. 보조 배낭의 끈이 떨어져 불편이 가중됐다. 산자락에 내려왔을 때 집 한채가 나오고, 그곳에 할머니 한분이 계셨다. 통하지 않는 말대신 떨어진 배낭 끈을 보여줬더니, 정성스럽게 꿰매준다. 배낭 속에서 간식용으로 가지고온 다시마를 꺼내주니 잘도 잡수신다. 옆에 있던 할아버지도 덩달아 손을 내민다. 여기에다 약간의 수고비까지 드렸더니 좋아서 어쩔 줄 모르신다. 이런 산중에도 돈은 최고의 가치를 발휘하는 것이다. 다시 지프를 타고 한참을 내려오니 식당이 즐비한 유원지 앞 같은 곳이 나온다. 우리나라 같으면 이런 곳에 산채비빔밥이 있었으리라. 그러나 허기진 배는 아무것이나 거부하지 않고 가득 받아들인다. 오후엔 코끼리 트레킹을 한다. 코끼리는 험한 산을 거침없이 탄다. 하지만 등에 두 명이나 태운 것도 동물 학대 같아 민망한데, 머리 위에 앉아 코끼리를 모는 청년은 더욱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계곡을 내려와 대나무 뗏목을 타고 급류를 내려온다. 키 큰 독일 청년과 함께 장대로 방향조절을 하는데 호흡이 잘 맞았다. 전생에 그 어떤 인연이 있었던가?/leehg1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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