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의 고전적 발원을 BC 7세기경의 고대 그리스로 꼽는다. 이를 무사(武士) 훈련용으로 삼은 로마가 영국을 침범하여 퍼뜨린 게 번창하여 오늘날 영국이 축구의 종구국으로 꼽히게 됐다.
영국은 축구경기를 꽤나 좋아했지만 게임 중 싸움이 잦았던 것 같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한동안 축구싸움 때문에 경기를 금지시켰으나 축구 열풍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영국축구협회가 생겨 근대식 규칙이 제정된 게 1863년이다.
발로 차는 놀이로 축국(蹴鞠)이라는 것이 삼국시대에 있었다. 가죽 주머니 안에 겨를 넣어 공을 만들었다. 19세기말 기독교 선교사와 외국 군인들의 왕래가 시작되면서 서양의 축구가 국내에 들어왔다. 공식 기록으로는 1904년 구한말 한성외국어학교가 축구를 체조 과목으로 채택한 것을 친다. 2년뒤엔 궁내부가 주도하여 ‘대한체육구락부’를 만든 것이 최초의 국내 축구단체다.
일제 치하에서는 1921년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가 열렸다. 1933년에 생긴 ‘경평축구대항전’은 전조선축구대회에 버금갈 정도로 인기를 모았다. ‘축구할아버지’로 기억하는 독자도 있을 것으로 아는 고 김용식옹이 제1회 경평축구대항전의 서울축구단 선수로 참가했던 분이다. 서울축구단과 평양축구단의 민간 협의로 이루어진 경평축구대항전은 서울과 평양을 번갈아 가며 한차례에 세번의 경기를 가졌다. 서울 장안과 고도(古都) 평양에 숱한 화제를 뿌리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중단됐다.
유서깊은 경평축구대항전 부활설이 전에도 있긴 있었다. 남북간 민간 왕래의 스포츠 교류로 더할 수 없이 좋은 전통적 경기다. 서울시가 경평축구의 부활을 북측 당국에 협의했던 것 같다. 북측 역시 긍정적이면서도 조건이 있었던 모양이다. 평양시내 아파트 및 건물 도색 그리고 도로 보수비 등의 지원을 요청받았다는 것이다. 이에 서울시는 100억원의 예산을 책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무슨 일마다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스포츠 교류라고 예외가 아닌 모양이다.
핵 문제를 비롯해 여러가지로 얽힌 남북간의 경색 국면이 풀리면 옛 경평축구의 재현을 비싼 값으로나마 보게 될 것 같다./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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