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지났다. 추석이 즐겁고 아름다운 명절임을 새삼스럽게 강조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교통이 혼잡하고, 육·해·공의 온갖 통행로가 꽉 막혀 숨이 막힐듯한 형편이지만 수천만의 민족 대이동을 보고 있노라면, 역시 추석이 진짜 명절이고 막을 수도 없고 식지도 않는 민족의 최대 명절이자 고유한 미풍양속의 민족적 행사임도 거론할 필요가 없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 날만 오래 가기를!”(加也勿 減也勿 但願長似嘉俳日)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열양세시기’라는 정조 때김매순(金邁淳)의 저서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렇게 덥고 짜증나던 여름이 지나 가을 바람이 솔솔 불어서 시원하기 짝이 없는 날씨, 하늘은 맑고 높아 청량하기 그지 없는 계절, 황금 물결로 넘실대는 아름다운 가을 들판, 햇 곡식이 나와 그래도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기 때문에, 오래 오래 추석날만 같기를 바라던 우리 선인들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한 정서가 아닐는지.
추석이 모든 사람들에게 기쁘고 즐거운 날이지만은 않다. 흩어져 지내던 혈육과 가족들이 만나고 맛있는 음식에 재미나는 대화가 있어 누구에게도 반가운 명절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 “타향에서 홀로 낯선 손님이니, 명절을 당할 때마다 어버이 생각 곱절로 나네.”(獨在異鄕爲異客 每逢佳節倍思親) 저 유명한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의 노래다. 그 좋은 명절에 객지에서 홀로 지내며 부모를 찾아가지 못하는 쓸쓸한 나그네는, 오히려 명절이 되면 더 괴롭게 마련이니 어찌 할 것인가.
실직으로, 질병으로, 감옥에 갇힌 이유로, 교통편이 없어서 고향을 찾지 못한 서러움은, 명절을 맞을수록 더 심해진다니 인간의 일이란 늘 그럴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 남들에게는 한없이 즐거운 날이지만, 반대로 나에게는 가장 서러운 날이 되고, 나에게는 가장 재미나는 날인데, 남에게는 가장 슬픈 날이 되고 마는 세상 일, 이런 때 일수록 서러운 사람이나 외로운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절실히 요구되는 때가 아닐는지. 그래서 요런 시절에는 불우한 이웃을 돕고 형편이 어려운 주변을 챙겨야 할 필요가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추석과 설날은 아직은 우리의 명절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옛날 우리들이 어렸던 시절만 해도 얼마나 많은 명절들이 기다리고 있었던가. 설날이 지나면 바로 정월 대보름의 큰 명절이 기다리고 있었고, 음력 3월 3일의 삼짇날이 또 우리를 즐겁게 했었다. 4월이면 초파일, 5월이면 단옷날, 6월이면 유두절이 있었고, 7월의 백중, 9월의 중굿날이 기다려졌었다. 동지 팥죽을 먹던 동짓날도 모두가 크게 쇠던 명절이었다.
시골의 마을 단위로 두레를 통한 농업생산이 경제의 주축이던 때가 지나자 도시산업사회로 바뀌면서 아름다운 명절은 대부분 사라져가고 말았다. 섣달부터 시작되던 연날리기, 정월 대보름 날 저녁에는 모두 날려버리고 일터로 돌아가던 지혜있던 옛 사람들이 그립다. 중구날에 국화주를 마시며 풍류를 즐겼던 풍속도 멋진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멋진 풍류나 아름다운 풍속들은 사라져만 가고 있으니 돌이킬 방법은 없을까.
그래도 한가닥 기대를 버리지 못한다. 지방화 시대가 열리고 자치단체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지방마다 옛것을 살리려는 축전이나 축제가 열리고 있다. 옛것을 제대로 복원하고 낭비가 방지되어 합리적이고 가치있는 방향으로만 전개된다면 그래도 다행이라 하겠다. 사라져가는 민족정서를 되살리고 야박한 민심을 순화시키기 위해서라도 미풍양속의 옛 정서나 민족혼이 살아나도록 머리를 짜낸 놀이의 재현을 바라고 희망한다.
잘못된 복원이 아닌가. 낭비만 부추기는 일은 아닌가. 제대로 따져 가치있고 바람직한 명절의 풍속이나 정서가 제대로 살아나기를 고대해본다.
/박 석 무 다산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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