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풍경 맛있는 음식…편안한 여유…
하노이를 출발한 버스가 12시간을 달려 후애에 도착한다. 긴시간 검은 밤길을 달린 탓에 엉덩이가 욱신거리고 온몸이 피곤하다. 해안을 끼고 달리는 탓에, 가끔씩 하얀 파도가 유령처럼 흰머리를 풀고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아직 거센 빗줄기는 차창을 쉴새없이 타고 내린다. 피로가 몰려온다. 아프리카에서 42시간 짜리 열차를 탈 때도 이렇게 불편하진 않았다.
반나절 동안만이라도 후애를 둘러볼까 했으나, 비 때문에 포기하고 도망치듯 계속 달린다. 무려 16시간만에 도착한 호이안은 비까지 멈추고 조용히 우리를 맞는다. 아담하고 아름답다. 혼자 멋대로 돌아다녀도 길 잃어먹을 정도가 아닌 것이다.
거리마다 역사 숨쉬는 ‘휴양의 낙원’
이곳은 한 때 중국과 인도 아라비아를 연결하는 중계 무역항으로 번영을 누렸다고 한다. 아직 일본과 중국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구 시가지의 전통 거리는 유네스코에 등록된 세계문화유산이다. 자전거를 빌려 시내를 훑어본다. 각종 사당과 올드 하우스들이 즐비하다. 내일이 구정이라 재래 시장엔 빠져나갈 틈이 없다. 그 시장의 한 쪽 편에 조그만 역사 박물관이 있었다. 힘들게 찾았지만 별로 볼게 없다. 차라리 강변을 거슬러 올라가서 빈민가를 살펴보는 것과, 조그만 나룻배를 저어 가는 사공들을 바라보며 일몰을 보는 즐거움이 났다. 노을진 투본 강에서 타이거 비어 한잔에 생선 덮밥을 먹고있는데, 한국인 아가씨가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다낭에서 방금 도착했고 남자 친구와 함께 있었다. 그는 호주에서 여행 중에 만난 일본 친구라며, 결혼할 사이라고 소개했다. 남자는 한국말로 꾸벅 인사를 했다. 순해 보이는 일본 남자와 씩씩한 한국 아가씨는 젊음 하나만으로도 못할게 없을 듯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그러나 이곳엔 한국인 관광객이 많아 일일이 아는 체 하긴 피곤한 일이니, 슬쩍슬쩍 지나치는 게 피차 개운하다. 구정 대목이라 집 생각이 난다. 아직도 서툴기만 한 가장으로서, 가족을 거느린다는 것은 어색하기만 하다. 그러니 통치력을 상실한 것은 방별 보다 훨씬 오래 전의 일이었으리라. M에게도 미안하다. 내일이 설인데 어떻게 보낼까? 그렇지만 모든 걸 잊기로 한다. 이 세상 일들이 고통이 따르지 않는게 어디 있겠는가? 사무치는 모든 괴로움과 적막감마저도 수용해야겠지만, 어쩌면 나는 헛 인생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행을 끝내고 돌아 갈 때마다 가족에 대한 나의 관심이 조금씩 깊어진다는 사실이다.
○해피 뉴 이어
낮에 강변을 거슬러 올라갔을 때, 무엇인가 만들고 있던 한 무리 남자들이 나의 접근을 막아 궁금했었다. 알고 보니 설 축제를 위한 장식용 구조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보다 더 구정을 중시하는 동남아 국가들은 구정이 돼서야 비로소 새해가 시작되는 것이다. 축제를 보러 젊은 남녀들이 계속 모여든다. 강변의 카페 테라스엔 서양의 젊은 남녀들이 주홍빛 촛불 아래 모여 앉아 맥주를 마신다. 수많은 사람들은 강물 위에 연꽃모양의 종이배를 띄우고 촛불을 실어 끝없이 흘려 보낸다. 새해 소망을 비는 것이리라. 까만 강물 위에 떠가는 촛불이 장관을 이룬다. 이제 확실하게 한해가 떠나가는 순간이다. 그렇다 나도 지난 한해를 작별하여야 한다. 이윽고 선상 쇼는 민속공연으로 이어지고 화려한 조명과 찢어지는 듯한 음향이 요란하다. 서구 문명적 이벤트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어차피 새해를 맞는 설렘은 미래를 열어 갈 젊은이들이 주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다지 어색할 것도 없는 축제이리라. 흥분 속에 카운트다운은 시작되고 ‘꽝’하는 불꽃이 하늘 높이 솟아오른다. 젊은 군상들의 뜨거운 함성이 밤을 찢는다. 불꽃놀이는 오래도록 계속되고 참으로 화려했다. 돌아오는 거리엔 어른들이 집집마다 향을 피우고 제를 올리는 모습이, 신앙과도 같은 이곳 사람들의 조상 숭배 정신을 알 수 있게 한다. 내 생애 잊지 못할 ‘해피 뉴 이어!’
○세계문화유산 미손
설날 아침이라 무언가 조용하다. 집집마다 언제든지 제를 올릴 준비가 돼있는 제상이 놓여있고, 향불 타오르는 연기가 여기저기 보인다. 호이안에서 45㎞ 떨어진 곳에 미손 유적지가 있다. 베트남에 있는 4개의 세계문화유산 가운데 2개가 이곳에 있는데 호이안의 구 시가지와 미손 유적이며 9세기 경에 축조된 가장 오래된 유적 중의 하나다. 입구의 정류장에 도착하니 구멍가게 아저씨가 반기며 자기 가게로 안내한다. 그의 딸들은 약간의 설음식을 내놓았다. 아저씨는 오늘이 설이라 미손 유적지는 입장료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들의 친절과 유적지를 공짜로 볼 수 있다는 흥분에 고조되어, 무상으로 대접받은 다과 값보다 훨씬 많은 돈을 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우리의 화끈한 팁은 잠시 후 본전 생각을 나게 했다. 매표소를 쳐다보지도 않고 산자락을 룰루랄라 올라가는데, 갑자기 제복을 입은 아가씨가 튀어나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오라고 유도한다.
‘오늘은 공짜라던데요?’ 그러나 그녀는 꾸짖듯 단호하게 돈을 내 놓으란다. 우리는 한푼도 빠지지 않은 입장료를 헌납하며 분을 씹었다. 얌체 같은 구멍가게 아저씨의 수작에 두 눈 까고 당한 것이다. 매표원은 대신 명절 선물이라며 팸플릿과 기념품(힌두신을 모조 한 것)을 하나씩 나누어준다. 내키지 않았지만 이쯤에서 고맙다는 미소를 보내니 그녀 또한 방글방글 웃는다. 선물은 주는 자가 더 즐거운 것이리라. 줄 것 다 주고 대나무 다리를 건너가고 있는데, 지프가 나타나 우리를 태우고 험한 산자락을 10여분쯤 달린 뒤 내려준다. 여기서 600m 쯤 걸어가니 유적지다. 원래 시바신을 모신 목조 사당이었던 것을 7세기에 벽돌로 재건했다고 하며 현재는 8~13세기 말까지 만들어진 70동이 넘는 유적이 허물어진 채 초목 속에 묻혀있다. 또한 이 사원은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끼워 맞춰 만든 건축 기술과, 아치를 사용하지 않고 지붕을 걸친 구조 등이 유명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사원은 자유 분방함이 좋다. 완벽한 복원이 아니라면 차라리 그대로가 낫다. 자연미를 건드려 흉물이 되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것인가. 사원은 여기 저기 흩어진 채 조금씩 다른 느낌을 준다. 그룹G엔 나무 한 그루가 원형의 돌 틈에 묘하게 끼어 숨을 헐떡이고 있다. K는 또 다시 그의 역사관을 무허가로 내 뱉는데, 액센트가 도올 선생을 패러디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숲 속에서 이건 분명 언어적 공해가 아닐 수 없다. 슬며시 그를 벗어나 나만의 길을 만든다. 새소리 풀벌레 소리, 그리고 늪지대가 나타나고 선명한 색채의 나비가 오솔길을 따라 날고 있다. 사색으로부터의 긴 시간 여행이 좋아 나는 그만 그 넓은 사원을 한 바퀴 더 돌고 말았다. 무엇보다 K가 보이지 않아 좋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그의 무대포식 얘기 앞에 나는 공부하기 싫은 학생처럼 탈출하여 해방되고 싶었다. 침묵이 이렇게 편할 때가 있지만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베이컨의 말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와의 여행관이, 목적과 방법 사이에서 평행선을 걷고 있는 느낌이다. 돌로 만든 그룹A의 신화도 다시 한번 느껴본다. 마치 우리나라 최고의 명당자리라는 남연군의 묘소와 같은 온화함이 느껴진다. 그룹 D의 라마상이 있는 참파왕의 신전도 발견했다. 그런데 별로 남아 있지 않은 이 군群이 웬지 웅장한 느낌을 주어 관심이 간다.(뒤에 이 신전이 가장 거대했던 것이었음을 나는 사무실 옆 미손 미술관의 그래픽 복원도를 보고 확인했다) 나는 이곳이 너무나 편안하여 풀밭에 드러 누웠다. 꼭 우리나라의 보원사지에 온 것처럼 따뜻한 정기를 느꼈다. 잠시라도 오수에 들고싶다. 그 속에서 지나간 추억의 시간들을 만나고, 사랑하고 미워했던 괴로움들, 그 고통스러웠던 연가를 불러보리라.
내가 그대를 죄 속에서 만나고/죄 속으로 이제 돌아가느니/아무리 말이 없어도 꽃은/깊은 고통 속에서 피어난다.//
누구에겐가 밀려가며 사는 것도/눈물겨운 우리의 내력이다.//나와 그대의 숨어있는 뒷일도/꽃잎 타고 가는 저 생의 내력이다.// - 마 종기 ‘담쟁이 꽃’중에서
느슨해진 마음을 조여 매고 유적지를 나선다. 버스 정류장까지 거의다 왔을 무렵, 뒤에서 K가 카메라를 잃어버렸다고 소리친다. 우왕좌왕 하더니, 그는 다시 지프에 올라 유적지로 향한다. 한참만에야 돌아오는데 표정이 좋지 않다. 먹이를 놓진 육식동물처럼, 시뻘건 얼굴은 극도로 흥분돼 있었다.
/leehg1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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