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사라
‘끝없는 선택의 삶’ 그 끝은…
200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보였던 독일·인도·프랑스·이탈리아의 합작영화 ‘삼사라(Samsara)’가 3년여 만에 26일 지각 개봉됐다.
화면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오지 풍물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명징하고 구도와 인과응보라는 주제도 뚜렷하지만 오히려 이 점이 영화를 더욱 낯설고 멀게 느껴지도록 만들어 관객과의 만남을 더디게 했는지 모르겠다.
영화의 배경은 해발 3천500m의 고원지대인 인도 북부 라다크의 한 마을. 호숫가를 따라 라마교 승려 일행이 길을 가고 있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동료 타시가 외부와 출입을 끊은 채 수행중인 토굴. 3년 3개월 3주 3일 동안 일명 면벽(面壁) 무문관(無門關) 수행을 마친 그는 린포체(스승이라는 뜻)로부터 고위 승직을 하사받는다.
5살 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절에 왔다가 불문(佛門)에 귀의(歸依)한 동자승이 이제는 촉망받는 수도승이 된 것이다.
그러나 동진출가(童眞出家, 어려서 산문에 들어옴)해 고행까지 견뎌낸 몸이지만 끓어오르는 욕정을 참을 수 없었던지, 아니면 전생(前生)의 인연을 끊지 못했던지 마을 축제에 내려갔다가 아름다운 처녀 페마에게 한눈에 반한다.
도반(道伴)의 만류도 그를 막지 못했고 여색(女色)을 호랑이나 뱀 본 듯하라는 부처님의 계율도 소용없었다. 페마도 운명처럼 다가온 타시를 거부하지 못한다. 결혼을 약속한 자마양이 있었지만 점쟁이에게 선택을 맡긴다.
환속(還俗)해 페마와 결혼한 타시는 평범한 산골 농부로 변신한다. 아들 카르마를 낳고 오순도순 살며 행복을 맛본다. 저울을 속이는 미곡 중개상 다와를 내쫓고 곡식을 직접 도시에 내다팔아 마을에 높은 소득을 올려주기도 한다.
자연의 변화 말고는 삶의 모습이 별로 달라지지 않는 산골의 일상을 담담히 좇아가다가도 영화 막바지에 이르면 초반부의 굴절 못지 않게 급격한 전환이 기다리고 있다. 초반부에 암시한 영화의 주제가 한꺼번에 드러나는 것이다.
영화 제목 ‘삼사라’는 산스크리트 어로 윤회(輪廻)라는 뜻. 아들 이름 카르마는 내세의 응보(應報)를 결정짓는 선악의 소행, 즉 업(業)을 일컫는 말이다.
선불교(禪佛敎)의 공안(公案) 중 하나인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에서 따온 배용균 감독의 영화 제목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처럼 불가(佛家)의 화두(話頭)를 빗대어 제목을 다시 짓는다면 ‘싯다르타가 집을 나간 까닭은’쯤 될까.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어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마르지 않을까’란 질문을 골똘히 생각하며 영화를 보는 것도 나름대로 지루함을 떨칠 수 있는 비결이다.
영화의 매력은 주제보다는 화면에 있다. 만년설을 이고 있는 연봉들,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하늘빛 물을 가득 담은 호수, 구절양장(九折羊腸)의 고갯길, 자줏빛 승복과 낭랑한 염불 소리, 알곡을 털고 빻는 장면이나 실을 뽑아 피륙을 짜는 모습 등은 한번쯤 이곳을 여행해보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인도 출신의 판 날린 감독은 가만히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히는 고산지대에서 15개국에서 모여든 스태프들과 영화를 찍느라 고행을 거듭해야 했다고 한다.
주인공 역의 숀 쿠는 뮤지컬 배우 출신의 신인이며 미곡상 다와 역의 락파 테링은 인도 남부 방갈로르의 수공예품 가게 주인. 페마를 빼앗기는 자마양 역의 켈상타시와 타시의 도반 소남으로 등장한 자마양 진파도 현지에서 캐스팅한 실제 농부와 라마승이다. 상영시간 138분. 18세 이상 관람가.
■청룡영화제 등서 주·조연상 후보 대거 올라
영화계에서 중견 배우들의 활약이 눈에 띈 한해였던 만큼 이들이 연말 각 영화제에서 결실을 보고 있다.
이달 29일 열리는 제 25회 청룡영화제와 12월 5일 개최되는 제3회 대한민국 영화대상에 주·조연상 중견 배우들이 대거 노미네이트되며 영광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원빈, 신하균 주연의 영화 ‘우리형’에서 두 아들의 어머니로 출연한 김해숙은 데뷔 이후 최고의 대접을 받고 있다.
대한민국 영화대상에서는 이미숙, 김혜수, 전도연, 강혜정과 함께 당당히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청룡영화제에서는 염정아, 엄지원, 추상미와 나란히 여우조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됐다.
특히 청룡영화제의 여우조연상에는 김해숙과 함께 ‘인어공주’에서 열연한 고두심도 후보에 올라 중견 배우의 파워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 ‘범죄의 재구성’에서 박신양과 화면에 꽉 차는 연기 대결을 펼쳤던 백윤식 역시 주연상과 조연상에 이름을 올렸다. 청룡영화제에서는 조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대한민국영화대상에서는 박신양을 제치고 주연상 후보에 올라 눈길을 끌고 있다.
대한민국영화대상의 여우조연상 후보는 중견배우들의 기세가 대단함을 새삼 확인시켜준다.
‘꽃피는 봄이 오면’의 윤여정과 ‘위대한 유산’의 김수미가 고두심과 함께 세를 형성했다.
‘올드보이’의 윤진서와 ‘거미숲’의 강경헌의 이름이 중견배우들의 그늘에 가렸다.
중견 배우들의 활약은 영화 시나리오가 보다 촘촘해지면서 이들이 주로 맡게 되는 부모 역할이 단순한 부모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탄탄한 연기력을 보여줄 수 있을 만큼 비중이 높아졌기 때문. 더욱이 백윤식의 경우 작년 ‘지구를 지켜라’와 ‘범죄의 재구성’에서 보여지듯 강한 캐릭터로 젊은 톱배우들과 당당히 경쟁을 벌이고 있다.
■노 맨스 랜드
유머와 버무린 ‘잔인한 현실’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사이의 전장. 한차례 총격전이 치러진 뒤 양 진영의 한복판에 세 명의 군인이 남겨진다.
세르비아 병사가 한 명인데 비해 보스니아 병사는 두 명. 하지만 이 중 보스니아 병사 한 명은 등으로 지뢰를 누른 채 하늘을 보고 누워있는 형편이니 일종의 힘의 균형 상태가 유지된다.
다음달 3일 개봉하는 영화 ‘노 맨스 랜드’(No Man’s Land, 수입 백두대간)는 안보고 그냥 지나치면 아쉬울 진흙 속의 진주 같은 영화다.
가벼운 듯 기발한 말장난과 유머를 유쾌하게 지켜보다 보면 전쟁에 대한 감독의 철학이 느껴지고 조금씩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줄거리를 쫓아가다 보면 전쟁의 참상은 어떤 다큐멘터리 보다더 강한 충격으로 전달된다.
‘노 맨스 랜드’에 고립된 세 명의 군인. 잠시 서로에게 마음을 열기도 하지만 결국 적일 수밖에 없다.
지뢰 위에 누워있는 보스니아 군인(필립 소바고비치)은 빨리 누군가 지뢰를 제거해 이 억세게 나쁜 운에서 해방되기만을 기다릴 뿐. 다른 보스니아 남자(브랑코 주리치)가 동료를 구하고 싶은 반면, 세르비아 남자(레네 비토라야츠)는 무조건 탈출만 하면 되니 서로 입장도 다르다.
그러던 중 UN 평화유지군이 사태 해결에 나서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외신들은 특종을 낚기 위해 모여들면서 상황은 더 복잡하게 꼬여간다.
잠시 긴장을 풀고 친교의 시간을 갖지만 제한된 공간 속의 적들은 조금이라도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일이 터지면 180도 돌변해 으르렁거릴 뿐. 코미디의 옷을 입고 시치미를 떼던 영화는 보는 이의 마음을 싸늘하게 만들 정도로 잔인한 결론도 준비하고 있다.
전체관람가. 상영시간 9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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