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여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수덕사 일주문 옆에 있는 수덕여관이 지어진 때는 정확하지 않다. 1939년 무렵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1896~1948)이 이혼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수덕사에서 수행 중이던 친구 일엽(1896~1971) 스님을 찾아 왔다가 수덕여관에서 눌러 앉아 1944년까지 머물렀던 것으로 미뤄 적어도 70년 가까이 된 건물로 추정된다. 수덕여관은 일엽스님이 출가 전 일본 명문가 자제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김태신(82)씨가 열 네살의 나이에 어머니를 못잊어 수덕사로 처음 찾아왔을 때 모자가 상봉한 눈물겨운 장소이기도 하다. 당시 일엽은 아들에게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고 했다. 김태신씨는 이후에도 어머니를 찾을 때마다 수덕여관에서 묵었는데 나혜석은 마치 친자식을 대하듯 팔베개를 해주고 자신의 젖을 만지게 하는 등 모성에 굶주린 일엽의 아들을 보살폈다고 한다.

충남 홍성이 고향인 세계적인 한국화가 고암 이응로(1904~1989) 화백이 수덕여관과 인연을 맺은 것은 선배화가 나혜석을 만나러 자주 수덕여관에 들르면서부터다. 고암은 1944년 무렵 나혜석이 이곳을 떠나자 여관을 사들였다. 고암은 수덕사 부근의 아름다운 풍광을 그렸고 여관운영은 부인인 박귀희씨가 맡았다. 그러나 고암은 21세 연하인 이화여대 졸업생 박민경(이응로미술관장)씨와 1958년 프랑스로 떠나 버렸다. 본부인 박씨는 이혼 후 홀로 여관을 운영했다. 이후 고암은 ‘동백림사건’(1967년)에 연루돼 2년간 옥고를 치른 뒤 몸을 추스리기 위해 1969년 약 두달동안 다시 수덕여관에 머물렀다. 그 사이에 뒤뜰의 너럭바위에 한국미술사에 남을 추상문자 암각화를 두점 새겼다. 국내 여관 중 유일하게 초가집으로 된 수덕여관의 현판은 이응로 화백이 직접 쓴 것이다. 수덕여관의 현재 소유주는 고암의 장조카인 이종진씨인데 이씨는 2001년 박귀희씨가 작고한 뒤 더 이상 여관을 돌볼 여력이 없어 경매에 내놓았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건물터가 수덕사 소유로 돼있고 너럭바위 자체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수덕사측과 이견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충남 도기념물 103호인 수덕여관의 건물주와 토지주가 각각 달라 한국근대미술의 중요한 역사 현장이 폐허가 돼가고 있어 실로 안타깝다./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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