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張保皐)는 ‘해도인(섬사람)’으로 790년께 전라도 해남 완도에서 출생한 것으로 전해져 왔다. 어릴 적부터 활쏘기와 창던지기에 뛰어나 ‘활보’ ‘궁복(弓福)’ ‘궁파(弓巴)’라고 불렀다. 20대 후반에 친구 정년(鄭年)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30살 남짓에 강소성 서주에서 군사 5천명을 거느리는 무령군 군중소장이 됐다.
하지만 무장으로 출세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당나라에 거주하던 신라인과 고구려, 백제 유민들을 규합해 무역에 종사하고 산동성 적산포에 ‘법화원’을 세워 유민들과 유학승들의 안식처를 제공하는 등 당나라에서 자치적인 집단을 이루고 있던 신라방과 신라촌을 거느리는 총수로 맹활약했다.
신라인들이 해적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리는 참상을 목격한 장보고는 828년 귀국을 결행한다. 흥덕왕을 배알하는 자리에서 군사 1만을 주어 청해진을 건설한다면 해적을 일소하고 국제무역으로 얻은 재부를 국가에 바치겠다고 약조한다. 왕은 주청을 받아들여 그를 ‘청해진 대사’에 임명한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해상활동을 펼쳐 해적과 노예상들을 일격에 소탕하고 각지에 난립한 군소 해상집단을 평정한 후 중국과 일본에 흩어져 있는 신라인들과 힘을 모아 신라·당 사이 국제적인 삼각 해상무역망을 구축했다.
거기에 자위적인 군사력까지 보유하여 동북아의 해상교통권과 무역권을 완전히 거머쥔다. 중국에는 ‘견당매물사’, 일본에는 ‘회역사’란 이름의 교관선단을 파견해 동북아 뿐만 아니라 멀리 아랍-무슬람 상인들과도 교역했다. 장보고는 자의반 타의반 중앙 귀족들의 왕권쟁탈전에 휘말리면서 딸을 46대 문성왕의 두번째 비(妃)로 바치기로 한다. 그러나 그의 세력 확대를 우려한 중앙 귀족들의 사촉을 받은 부하 염장에게 술자리에서 피살(846년)되고 만다.
정치의 권모술수에 희생된 장보고의 출신이나 행적, 역사적 평가에서 아직은 이의나 모호한 점들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해상왕국의 건설자’, ‘해양상업 제국의 무역왕’으로서 ‘인의지심(仁義之心)’과 ‘명견(明見)’을 두루 갖춘 ‘창조적 위인’이라는 사실이다. 요즘 KBS-TV 드라마에서 장보고와 신라선단의 활동을 ‘해신(海神)’에 비유한 것은 과장이 아니다.
/임병호 논설위원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