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진 7월 갑진삭 11일 갑인 절충장군 독성 김후는 감히 화성(華城)의 성신(城神)에게 밝히 고합니다. 엎드리어 생각컨대 물건이 크게 강하게 되는 데에 신의 힘이 없는 법이 없습니다. 이 큰 고을에 성을 쌓았으니 이것이 모두 지신(地神)의 덕입니다. 왕국의 울타리이고 자제들에게는 가리개 구실을 할 것입니다. 이 성을 쌓을 때에 명공을 빌기 위하여 서쪽 기슭에 집터를 잡고 임금께서 엄숙히 임어(臨御)하시고 큰 마음을 쓰시어 제사를 올리어 흠향하게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복과 수를 주시어 몇 억만년의 국기(國基)가 여기에 이루어졌습니다. 처음과 같이 영원하게 복을 드리워 주시옵소서. 삼가 희생(犧牲)과 단술로 몇 가지 음식을 진설하오니 밝히 흠향하시옵소서.”
1796년 7월11일 독성 중군 김후가 올린 성신사개기고유제문(城神祠開基告由祭文)이다. 조선조 제22대 정조대왕은 화성 성역이 완료되는 시점에 수도 한성부의 종묘와 같은 공간 조성의 필요성을 느꼈다. 갑자년(1804) 양위 후 수원으로의 이어(移御)를 위하여 화성유수부(수원)의 위상을 높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조대왕은 모친 혜경궁 홍씨가 고희를 맞이하고 세자(후일 순조)가 15세가 되는 갑자년에 왕위를 물려주고 모친과 수원에서 살려고 했었다.
정조대왕은 화성 성역시 서울의 제도와 같이 사직단, 문묘, 종각 설치와 더불어 성신사를 설치하고 성신사 완공 후 성신에 대한 고유문(告由文)을 직접 짓기까지 하였다. 특히 성신사 낙성연에 친히 참석하여 제사를 주관코자 했으나 갑작스런 서울의 홍역 창궐로 세자를 보호하기 위해 수원행차를 취소하였다.
최근 사단법인 화성연구회가 일제 강점기에 멸실된 성신사를 중건하기 위하여 ‘성신사중건추진위원회’를 발족키로 한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다. 화성 보호를 성신에게 축원했던 성신사는 정조대왕이 수원에 올 때마다 참배하였을 뿐 아니라 화성유수가 대소사 시행 전 만사형통을 기원한 유서깊은 장소다. 성신사가 중건되려면 강감찬 장군 동상 이전과 5억원의 사업비가 필요하다. 수원시의 관심과 예산 배정이 요청된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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