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론

‘호도(糊塗)’는 우리말로 ‘바보’라는 뜻이다. 그런데 중국 가정에서는 우리가 보통 ‘가화만사성’이니 ‘소문만복래’니 하는 글귀를 좋아하는 것 처럼 ‘난득호도(難得糊塗)’라는 말을 생활의 지침으로 삼는다고 한다. 판교 정섭(1693~1765)이 지은 ‘난득호도경’도 있다.

노자(老子)가 이미 ‘기교가 뛰어나면 어리석어 보이고 훌륭한 말일수록 어눌하게 들린다(大巧若拙 代辯若訥)’고 했으니 어리숙함이 지혜와 맥이 닿았다고 믿어온 역사는 오래다. 공자(孔子)도 ‘군자는 덕이 성대해도 겉 모습은 어리석은 자와 같다’하였고, 소동파(蘇東坡)역시 ‘참으로 용맹한 사람은 겁쟁이처럼 보이고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어 보인다’고 말했다.그러니까 덜 되 어리숙한 게 아니라 의식적으로 바보 같이 구는 것을 처세의 중요한 방편으로 여긴 것이다. 단순한 것이 자신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면 아예 ‘얼굴을 두껍게 하여 술 취한 척, 잘 안들리는 척, 미친 척, 죽은 척 하여 상대가 어찌할 도리가 없게 만들어야 한다.

중국 위(魏)·진(晉) 시대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한 명인 원적(阮籍)에게 딸이 있었다. 위나라의 권신 사마소(司馬昭)는 그 딸과 자신의 장자 사마염(司馬炎)을 혼인시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원적은 사마소 같이 권력에 빌붙어 위세 부리는 사람과 사돈지간이 될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렇다고 마땅히 거절할 명분도 없었던 그는 매일 술에 취해 지냈다. 두 달 동안 찾아갈 때마다 술에 취해 있는 원적을 본 사마소는 혼사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생각을 접었다. 이 일로 앙심을 품은 사마소는 원적에게 국사에 대한 의중을 떠본 후 그걸 빌미 삼아 처벌할 계략을 냈지만 그것도 실패했다. 꼬투리 잡으러 갈 때마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입 한 번 잘못 열었다가는 목숨 보전도 어려운 난세에서 술은 처세의 방편 정도가 아니라 자신을 지키는 훌륭한 수단이었다.

우리나라에도 권력의 암투에서 살아 남기 위하여 광인인 척, 주정뱅이인 척 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우리 주위에 원적 같은 사람이 도처에 있을 터이니 술 취했다고 사람 함부로 볼 일 아니다. 술 많이 먹는 사람의 심사도 알아줘야겠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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