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엔 원래 민족의 개념이 없다. 국제공산당은 민족주의를 이단시했다. 오직 1국1당(공산당)에 의한 국제공산주의 혁명을 추구했다. 국제공산당은 1919년 3월 레닌이 주도한 러시아 공산당과 독일의 사회주의 좌파를 중심으로 조직된 세계 각국 공산당의 통일적 국제 조직이다.
1945년 광복이후 좌우익 이념 대립이 격화됐을 때다. 보수 우익세력을 민족진영이라고 불렀다. 혁명 좌익세력은 민족주의를 국수주의로 보았다. 국제공산주의 개방 노선에 위배됐기 때문이다. 그 무렵(북녘을 포함한) 국내 공산주의자들의 찬탁 돌변은 그같은 대표적 사례다. 공산주의자들도 처음에는 미·소 등 강대국 신탁통치안에 민족진영과 함께 반탁운동을 벌였다. 그랬던 게 하룻밤 사이에 찬탁으로 돌아섰다. 모스크바의 지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족공조론은 평양 정권이 내세우는 간판 메뉴다. 최근에는 김정일 이념으로 무장화 됐다. 모든 문제 해결에 만능으로 대입되는 공식이론이 ‘우리민족끼리’라는 용어다. 저들은 우리를 외세와 결탁하는 반민족주의로 왜곡한다. 민족의 개념을 거부하던 공산주의자들이 민족이란 말을 황금시하는 것은 공사주의 원전에 어긋난다. 변질이다. ‘우리식 사회주의’자체가 공산당 선언이 금기로 삼은 수정주의다. ‘수령론’을 신앙화 한 지도체제는 공산주의 혁명론이 가장 경계했던 종파주의다.
북의 핵 무기 농간이 극점으로 치닫고 있다. 북만이 아니다. “북한이라도 핵무기를 가져야 한다. 그러니까 미국이 관심을 갖지 않느냐”라고 말하는 시각이 남한 내부에도 있다. 그러나 핵 무기의 생존 수단화는 입에 칼 물고 도랑 뛰기다. 파키스탄이 핵 무기를 가져 잘 산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핀란드나 뉴질랜드 같은 나라는 핵 무기가 없어도 잘만 산다.
핵 무기는 결국 핵의 재앙을 불러 들인다. 한반도 비핵화 선언은 이래서 꼭 지켜져야 한다. 평양 정권이 시한폭탄 같은 핵 무기를 가져서는 평화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가 북의 핵 문제에 미국과 입장을 같이 하는 것은 미국이 이뻐서가 아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다. 민족을 위해서다. 남쪽에서 쌀이든 비료든 ‘달러’든 얻어갈 수 있는 것은 다 얻어가면서 핵 문제는 미국만 상대하려고 한다. 남쪽은 빠지든지 아니면 민족 내부 의 일로 자기네 편에 서서 해결하자고 우긴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민족에 대한 인식과 저들이 말하는 민족의 인식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순수한 동포애로 보는 우리의 인도적 인식과는 달리 저들은 의도적 정략화로 보는 혁명사상이 내포됐다. 우리는 이래서 북녘 땅에 대한 미국의 핵 무기 공격을 반대하지만 평양 정권은 다르다. 최악의 경우엔 남녘 동포를 향해 핵 무기를 쓸 수 있는 것은 이를 혁명과업 완수라고 저들은 믿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북에서는 혁명사상 재무장을 모든 전달 매체를 통해 독려하고 있다. 당 간부도 혁명사상의 이완이 있다면서 맹렬한 자체 비판이 진행 중이다.
이틀로 잡았던 차관급 회담인지, 실무자 회담인지가 이틀이 지연되어 나흘로 잡혔다. 공동보도문 합의 작성이 난산인 것은 핵 문제 때문이다. 회담에서 핵 문제를 꺼낸 것은 이쪽일 뿐, 저쪽은 시큰둥하게 듣기만 했다. 평양 정권이 문제인 것은 사실이지만 원망스러운 건 우리 정부다. 국제사회 보기가 창피하다. 이런 회담을 하자고 그동안 그토록 북에 애걸복걸 한 것을 생각하면 정말로 딱하다. 북쪽 사람을 만나거나 평양에 왔다 갔다 하는 걸 장관이나 대통령 재임 중 업적으로 여길 계제가 이젠 아니다.
우리는 그간 북에 돈을 퍼주고 평화를 사왔다. 평화를 살만하면 돈을 주고라도 사긴 사야겠지만 상대를 잘못 길들여서는 평화를 지키는 게 아니다. 이 정권은 평양 정권을 완전히 잘못 길들여 만만하게 보이는 지경이 됐다. 김정일 위원장에게 매정하게 당하다가도 눈 한 번 깜박해가며 웃어 보이면 감지덕지하는 모양새가 되어서는 대화다운 대화가 될 수 없다. 저들은 사회주의 이념도 자기네들 편리하게 멋대로 바꾼 사람들이다. 민족의 개념도 자기네 입맛에 맞게 고친 사람들이다.
차관급회담은 북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더욱 난감하게 만들었다. 앞으로의 전망이 매우 불투명하다. 이 정권은 평양 정권을 좀 더 알고 상대해야 한다.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니라면) 정신차려야 한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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