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후반 어느 해인가 파리의 루브르(Louvre) 박물관에서 몇 날을 보낼 기회가 있었다. 워낙 그곳의 전시물이 많은 탓도 있었지만 당시 파리에서 하는 일이 시간을 끄는 일이어서 무료한 시간을 나름대로 유익하게 쓰기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당시 루브르 박물관은 지금처럼 시스템을 개선하기 이전이었는데, 입구에 들어서면 가이드들이 각국 언어별로 손님을 모아 일정액의 금액을 받고 안내하고 있었다. 며칠 동안이나 나는 영어 팀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뒤를 따르며 약간 떨어져서 가이드가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그런데 며칠을 그렇게 하다보니 영어 팀에게만 매번 화장실에서 제일 가까운 곳을 배정해 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무심히 보았는데 그 어떤 의도가 엿보이는 듯했다.
당시 파리사람들은 영어로 무엇을 물어보면 불어로 답을 한다든가, 아예 아무런 대꾸도 않는다든가 하는 걸 보면서 이들이 미국에 대해 억지로라도 우월감을 갖고자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네들의 그런 저변에는 무엇이 작용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데 생각이 미치자 당시 내가 하고 있던 일과 연관시켜 그네들의 과학 기술력을 떠 올려 보았다.
1960년대의 프랑스는 영국과 독일에 비해 전후복구가 뒤늦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전화의 경우를 보면 시외전화나 국제전화를 하려면 공중전화 앞에서 몇 십 분을 기다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1959년에 대통령이 된 드골정부에 의해 당장의 서민을 위한 투자보다는 미래에 대한 투자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콩코드(Concord), 떼제베(T.G.V.), 조력발전(tidal generation), 고속증식로(fast breeder reactor: FBR), 전자교환시스템(ESS)등 5대 국책과제에 그들의 미래를 거는 야심찬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드골정권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와 인기는 자꾸 낮아질 수밖에 없어 그는 결국 1969년에 하야(下野)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하야한 후 70년대 들어 그가 추진했던 프로젝트들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날로그(analog) 대신에 디지털방식의 전자교환시스템을 세계에서 제일 먼저 상용화해 그간의 전화적체를 단시일에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미니텔(mini-tel)이라는 서비스를 그동안 기다려준 대가로 무료로 제공하는 국가가 되었다. 콩코드 비행기는 미국에 대해 프랑스의 자존심을 한껏 드높여 주는 첫 번째의 자랑거리가 됐다. 떼제베 역시 미국에 없는 지상수송의 총아로 군림할 수 있게 해줬다. 또 1966년부터 가동중인 랑스(La Rance)에 있는 세계 유일의 조력발전소는 발전(發電)은 물론 유명한 관광자원이 될 정도로 되었다. 그리고 사용 후 핵연료(spent fuel)를 재처리하여 플루토늄(plutonium)을 생산하는 것과 연관되는 고속증식로 역시 프랑스의 자존심을 한껏 높여주는 작품이 됐다.
전후 오늘의 프랑스의 밑거름은 바로 1960년대 드골 정부에 의해서 마련되었던 것이다. 인기나 지지도를 따르기보다는 프랑스의 미래를 더 중시했던 참다운 지도자상을 그는 보여 줬다고 생각한다.
오늘 몰아치는 비바람이 언제 그칠까 했는데 언제 그랬었느냐는 듯이 멈추는 것처럼 날씨와도 같은 인기(人氣)를 쫓지 아니하고, 내일의 국부창조력을 키우는데 신념(信念)과 애국심(愛國心)을 가졌던 드골(De Gaulle)은 그래서 프랑스의 영원한 국부(國父)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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