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별(寄別)이란 소식을 알린다는 뜻이다. ‘기별지’(寄別紙)가 있었다. 신라 신문왕 12년(692년)에 이두문자로 조정에서 발행했다. (삼국사기·설총전)
‘조보’(朝報)가 또 있었다. 조선조 초기에 조정의 결재사항과 견문록 등을 기록하여 관아에 돌렸다. 승정원에서 이를 맡아했다. 승정원은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과 같은 왕의 비서실격이다. ‘기별지’나 ‘조보’는 오늘날의 관보(官報)와 같다. 비록 관보 성격이긴 하지만 학계는 이를 왕조 치하의 고대적 신문으로 보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민간 ‘조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선조 11년(1578년) 한양에서 역시 ‘朝報’라는 이름으로 신문 성격의 일간지를 제작해 팔았다. 기록에 의하면 ‘매이자생’(賣以資生), ‘팔아서 자본을 만들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구독층이 꽤 많았던 것 같다. 금속활자의 발달로 시작된 민간 조보는 그러나 몇 달 못 가 선조의 엄명으로 폐간됐다. 관련자들은 ‘나라의 기밀을 누설시켰다’는 죄목으로 유배되고 대사간과 대사헌이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조선조 고종 20년(1883년) 통리아문 박문국에서 ‘한성순보’(漢城旬報)가 발간됐으나 순 한문으로 만들어졌다. 중간에 갑신정변으로 일시 휴간된 적도 있다가 1888년 박문국이 폐쇄되면서 5년만에 폐간됐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민간인이 순 한글로 신문을 만든 것이 고종 건양 원년(1896년) 4월7일에 나온 ‘독립신문’이다. 당시 독립협회의 서재필 등이 발간했는 데 ‘신문의 날’을 4월7일로 정한 게 이에 연유한다.
그로부터 92년만인 1988년 오늘 경기일보가 창간되고 17년이 되는 올해는 독립 신문이 나온 지 109년째 되는 해다. 그동안 국내 신문은 조선조말 민족 계몽지, 일제 저항지, 광복 직후의 이념지, 자유당 독재 항거지, 경제성장 이후에는 상업지 등으로 변모해 왔다. 이 정권 들어서는 같은 상업지이면서도 색깔을 드러내는 경향이 많다. 경기일보는 온건 개혁을 수용하는 중도 보수지를 지향한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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