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가면

박인환(朴寅煥·1926~1956)은 20세에 “나의 시간에 스코올과 같은 슬픔이 있다”는 시작되는 ‘거리’라는 시로 시인이 됐다. 중학생 때부터 영화광이었던 그는 한국 최초로 ‘영화평론가협회’를 발족한 영화평론가이며 번역가였다. 그러나 박인환은 문단에 여러 화제를 뿌린 만큼 시인으론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는 특히 프랑스의 시인 장 콕토를 정신적 지주로 삼을 만큼 열렬한 팬이었다. 그래서인지 박인환의 꿈은 ‘한국의 장 콕토'가 되는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런 그였지만 시집은 ‘박인환 선시집’ 한 권 밖에 없다. 그 시집의 원제목은 ‘검은 준열시대’였으나 그가 평소에 좋아했던 스팬더의 선시집을 본따 ‘박인환 선시집’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의 일화 중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명동에 있는 술집 ‘경상도 집’에서 즉흥적으로 쓴 ‘세월이 가면’에 이진섭이 곡을 부쳐, 나애심이 노래 부른 사실이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네. // 바람이 불고 / 비가 올 때도 /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로 시작되는 그 노래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 부르는 애창곡이다. 외상 술을 마실 때에도 시인답게 “꽃피기 전에 갚을게”라고 말한 그의 별명은 ‘명동의 연인’이었다.

“아, 답답해”란 마지막 말을 남긴 채 31세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6·25 한국전쟁 후 폐허와 무질서, 불안과 허무 등 시대적 고뇌를 신선한 언어로 노래한 서정시인 박인환은 ‘목마와 숙녀’란 자작시에서 ”한 잔의 술을 마시고 / 우리는 버지니아 올프의 생애와 /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하략)”고 하였다.

‘세월이 가면’에서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 그 벤취 위에 / 나뭇잎은 떨어지고 / 나뭇잎은 흙이 되고 / 나뭇잎에 덮여서 / 우리들 사랑이 / 사라진다 해도. //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네. /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라고 노래하였다. 그의 시처럼 ‘세월은 가고 오는 것’이어서 그런가. 박인환 시인이 정말 가슴에 살아 있다.

/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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