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술에서 투시원근법은 이태리 르네상스에서 시작되었으며 소실점을 향하여 모든 사물이 단축되는 이 원근법은 르네상스시대에 만들어진 독특한 보는 방법이다. 마찬가지로 알타미라동굴벽화로부터 현대의 회화들까지 미술사에서 나타나는 모든 표현 방법들은 그 시대의 보는 법을 말해준다.
구석기시대의 알타미라동굴벽화에서는 들소들이 사실적으로 표현 돼 있다. 마치 들소를 사냥하는 현장에서 그대로 그린 듯하다. 사실적으로 그려진 들소들은 사냥한 것과 같은 효과를 갖는다는 그 당시의 구석기인들의 주술적 세계관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고대 이집트 사회나 우리나라의 고구려 고분 벽화, 서양의 중세에 이르기까지의 대부분의 표현들은 사물(특히 인물)의 크기를 계급과 신분의 중요성에 따라 차이 나게 그렸다. 이는 바로 신분이나 계급사회의 세계관을 나타낸 표현법이다. 지금도 대부분의 아동의 그림에서 엄마가 아빠 보다 크게 그려지는 이유는 아동들에게는 엄마가 더 중요하고 크게 보이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이전의 중세시대 그림들이나 동양의 산수화들에서는 그림들을 옆으로 옮겨 가면서 또는 아래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책을 읽듯이 보아야했다. 표현하는 화가들도 산은 올려다 본 모습과 계곡은 내려다 본 모습을 합성해서 그렸다. 예컨대 정선의 ‘금강전도’는 곳곳을 다니며 여행하듯이 그린 그림을 한데 모아 놓은 것이다. 그래서 보는 방법도 두루두루 여행하듯이 살펴 보아야한다. 그런가하면 우리나라의 민화에서처럼 뒤에 있는 것 까지 잘 보여주기 위하여 앞에 있는 물건보다 크게 그리기 까지 했다. 이름하여 역원근법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보는 방법에 따른 표현들이 이태리 르네상스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격게 된다. 바로 투시원근법이다. 이 투시원근법은 알려진 대로 하나의 소실점을 향하여 그것에 시선이 집중 수렴되도록 하는 표현법이다. 일종의 공간의 수학화이며 과학적 눈의 시각원리를 따른 보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방법은 한눈으로 전체의 화면을 파악할 수 있는 구도의 통일적 종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구도는 개개의 부분이 전체와 논리적으로 합치되고 비례의 통일적 기준이 만들어져 하나의 모티브에 집중된 묘사를 가능하게 해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처럼 모든 것이 작아지면서 가운데 앉은 예수의 머리에 시선이 모인다. 다른 인물들은 주인공 예수를 위한 엑스트라에 불과하다. 그러면서 이런 구도에서는 보는 사람이 주인공의 맞은편에 앉아 있으며 그는 이런 구도를 통해 세상을 한눈에 파악하고 장악한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투시원근법은 바로 자본주의의 탄생과 일치하고 있다. 그 당시 ‘인간과 세계의 발견’이라는 이태리 르네상스는 바로 이태리 르네상스의 자본주의적 경제, 사회제도의 발전에 의해 가능했다는 것이 이것을 연구한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은행제도의 성립, 노동의 조직화, 교역기술, 신용제도, 복식부기, 노동가치와 시장논리 등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개념들이 정착되면서 합리적인 공리성, 합목적성, 계획성, 타산성의 자본주의의 정신이 확립된다. 이러한 자본주의적이며 합리주의적 세계관이 통일성의 원리인 투시원근법이라는 새로운 보는 방법을 탄생시킨다.
한눈에 파악할 수 있고 하나의 절대 점을 향해 질서정연하게 집중해야하는 투시원근법의 통일성의 원리는 자본의 논리를 세계로 확장시킨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와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미술가들은 질서정연한 투시원근법의 매력을 알고 있지만 투시원근법에 의해서만 세상을 보고, 사고하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다국적)자본의 힘으로 세계를 통일 시키고 시장 논리에 의해서만 세상을 지배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김 정 헌 화가·공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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