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즘에 파묻혀 ‘성찰’ 결핍 ‘복합적 장르’ 차별화 역부족
/허명진
여자에게 있어 거울은 숙명인가. 이 거울의 은유가 일차적으로 불러내는 것은 나르시즘이다. 하지만 흔히 그 도취적 성격에 압도된 나머지 좀더 중요한 이차적 의미는 간과되곤 한다. 바로 나르시즘을 통해 나르시즘을 극복하는 반성적 의미의 그것이다. 즉, 그 안에 빠져 있으되 그 자체를 응시하는 이중의 반사를 말한다. 그러한 성찰이 결여된 작품의 결과는 처참하기 마련이다. 허성재가 안무한 ‘거울 속 여자’ 역시 성찰적 힘의 결핍으로 수용자를 따돌린 채 거울 속으로 투신해버리고 만 작품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럴 의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지난 9월 25일 하남이성문화축제의 일환으로 하남시청 야외특설무대에 올려진 이 작품은 상당히 의욕적인 설계도를 참고하고 있다. 즉, 거울을 매개로 시작되는 한 여자의 자아탐색과 그로부터 남녀관계에 대한 어떤 대안적 세계관까지 제시하려는 포부마저 내비친다. 그러나 이 내면의 지도를 만인과 공유할 수 있도록 외면화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이번 작품의 경우 그 외면화의 능력에 있어서 치명성을 노출시키는데, 바로 극적 표현의 상투성과 용도 잃은 진부한 춤사위에의 몰입이다. 그리하여 작품은 대부분 역동적인 남성 군무로 무대를 휘감으며, 통상적인 남녀 구분과 역할에 의존하는 멜로드라마로 치달음을 면치 못한다. 주제에 걸맞는 신선한 표현을 기대하기엔 역부족이었을까. 안무자의 스승 국수호로부터 물려받은 창작춤 유산의 파편들이 도처에서 흔적을 드러내는데, 그 특유의 드라마틱한 극성과 가부장적 춤의 약호들은 확실히 강도가 떨어져 있다. 하지만 그러한 약화의 공법은 페미니즘적 주제를 실현시키기엔 너무 단순한 전략 아닌가. 그래서 허성재의 안무는 아무리해도 전통적인 남성성과 여성성이 여전히 부각되어 나타난다. 낡은 틀을 고수한 채 그와 상반되는 내용을 담으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역시 새 술은 새 부대를 필요로 한다.
안무자는 나름대로 차별화된 시도를 감행한다. 우선 도입부에서 고재경의 마임은 신문자락에 파묻힌 무심한 남편과 그의 눈치를 보며 집안일을 하는 아내의 건조한 일상에 근접한다. 하지만 이러한 첫 장면 이후 군무의 갈피마다 연극적 형태로 끼어드는 여자의 자아상은 다소 신파적이다. 여성성이나 남성성 가운데 서로 반대편 성의 속성을 발견하고 남녀의 규정을 초월해 서서히 변신해 가는 ‘올란도’ 같은 자아라기보다, 오히려 벼락처럼 각성한 ‘자유부인’ 같다고나 할까.
또한 무대 양쪽에 버티고 있는 대형 스크린에서는 대본으로 사용된 시와 3D 애니메이션이 투사된다. 가장 단순하게 몸 형태만 남긴 목각인형 같은 형상은 표정도 없이 입체의 환영 속에서 춤춘다. 그것은 무대에서 벌어지는 일에 비해 초연하다. 그저 한국춤 혹은 발레 동작을 표시하면서 기계처럼 작동할 뿐이다. 동작의 애니메이션화에 대한 실험연구 같은 그것은 무대와 명시적 연관없이 격리되어 있으며 객석과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이 작품 자체가 처한 고립무원의 실상을 가리키는 듯하다.
몰입은 하되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은 격이다. 사실 메시지를 중심으로 모든 요소들이 하나 되는 총체적 성격의 예술은 강력하고 집결된 흡입력을 발휘하곤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몰입 대신 미적 거리를 확보하는 작업은 분명 아니면서 요소들의 융합에 실패한다. 복합 장르적 시도들은 서로 엉겨붙지 못한 데다가 야외무대라는 조건은 산만함을 가중시켜 더욱 불리하게 작용했다.
거울을 쓰려거든 제대로 썼어야 했다. 이는 몰입을 시켜야할 자가 본분을 잃고 스스로에게 몰입된 경우였다. 무의식적으로 침범하는 익숙하고 고루한 틀의 지배, 내용과 형식이 배치되고 부분들끼리 어울리지 못하는 일관성의 와해는 거울의 일차원적 용법에서 비롯된 비극이었다. 물론 춤사위에 대한 무수한 천착은 있었겠으나, 창작은 그것만으론 충분하지 않은 법이다. 더구나 이미지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이 시대의 관객들은 결코 녹록치 않다. 그들의 감각이나 감수성과 접점을 찾지 못한 채 자기만의 방에 갇히는 것은 곤란하다./무용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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