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 '섹스와 철학'

국내외 블록버스터들의 공세가 12월 극장가를 달구는 가운데 시류와 상관없는 예술영화 한 편이 조용히 개봉한다.

이란의 거장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의 '섹스와 철학'이 9일 종로 필름포럼(구 허리우드 극장)에서 개봉한다.

영화는 마흔 살 생일을 맞아 지나온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미래를 시작하려는 한 댄스학교 교사 조언의 이야기다.

그에게 지나온 삶은 네 명의 여자들로 요약된다. 사랑을 빼놓고는 삶을 논할 수 없다는 조언의 사랑에 대한 담론이 펼쳐지는 것. 이 과정에서 댄스학교의 학생들은 꾸준히 집단 무용을 선사하는데 이 광경이 대단히 이색적이다. 특히 팔을 이용한 전위적인 동작들이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대단히 애절하게 느껴진다.

조언은 생일날 약간의 시차를 두고 이들 네 여인을 댄스학교에 초대한 후 한 명씩 붙잡고 이들과의 사랑을 반추한다. "모든 사랑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돼"라고 믿는 조언은 네 여자와의 만남을 모두 운명이라 여긴다. 제3자의 시선으로 볼 때는 중년 남자의 젊은 여자 꼬시기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음에도 말이다.

이들은 육체적 사랑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는 대신 시적인 대화를 나눈다. 여타 서구 영화들과는 180도 다른 접근법. 이 중년 남자의 욕망은 한 여자와 춤을 추듯 손을 에로틱하게 포개는 단 한 장면만으로 표출될 뿐 그 외에는 모두 대화를 통해 소화된다. 다분히 '이란'적(?)인 것. 결국 댄스학교 학생들의 온몸을 이용한 현대무용이 그의 속마음을 대변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여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는 진정한 사랑의 순간은 단 몇 초, 몇 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다.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은 없다"며 결국 "평생 사랑을 찾아 헤맸지만 돌아온 것은 외로움뿐"이라는 우울한 결론이 나온다.

상실감과 허탈감에 빠진 한 중년 남자의 하소연은 영화의 앞뒤에 등장하는 맹인 가수의 구슬픈 노래를 통해 정점을 찍는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단풍길과 눈밭은 스러져가는 중년을 상징한다.

그러나 찰나일지라도 사랑은 행복한 것. 지금은 모든 것이 덧없다고 느끼는 주인공이지만 마흔 살 생일을 기점으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처음부터 '새 출발'을 운운했던 그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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