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에게 재봉틀은 선망의 살림 밑천이었다. 결혼할 땐 단연 혼수감 1호로 꼽혔다. 신혼부부 살림에서 재봉틀이 있으면 은근히 자랑이 되기도 했다.
지금의 50대 후반의 어머니들이 처녀적 까지만 해도 그랬다. 가정생활의 필수품이었지만 정작 사들이기에는 서민들로서는 가격이 벅찼다. 지금은 집에 재봉틀을 두는 사람이 없다. 재봉틀 자체가 오히려 촌스러워 보인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갖가지 기성복이 시중에 널려 집에서 옷을 만들 이유가 없을 뿐만이 아니라 옷이 낡아져 꿰매야 할 만큼 떨어지는 일도 없다. 옷이 낡아 못입는 것이 아니고 너무 오래 입은 탓으로 멀쩡한 옷도 그냥 버린다.
재봉틀을 최초로 고안해낸 것은 1790년 영국의 세인트란 사람이다. 그러나 원시적이어서 실용화되진 못했다. 1834년 미국인 헌트가 비로소 초보적 바느질이 가능하게 만든 재봉틀을 1854년 월슨이 정교한 박음질 재봉틀로 개량했다. 국산 재봉틀이 생산된 것은 1950년대 후반이다.
재봉틀은 이토록 장구한 세월을 거치면서 발달을 거듭했다. 지금의 재봉틀에서 예전처럼 발이나 손으로 돌리는 수동식 재봉틀은 없다. 공업용 재봉틀은 물론이고 세탁소 같은데서 쓰는 재봉틀도 전력으로 돌아가는 자동식이다.
재봉틀이 아주 귀한 선물로 여긴 북녘의 물정이 이쪽의 1960년대를 생각나게 한다. 평양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아리랑 공연의 대집단체조 참가자 5만2천여 명 모두에게 ‘김일성청년영예상’ ‘공로메달’ 등과 함께 중국서 수입한 수동식 재봉틀을 선물로 주었다. 훈련 기간이 1년 넘게 걸린 대집단체조 훈련과 공연에 학생들이 겪은 고생은 이루 다 말할 수 없겠지만, 전원에게 내린 재봉틀 선물은 귀한 재산으로 뜻밖의 ‘장군님’ 하사품인 것이다.
지난 8월16일부터 시작된 아리랑 공연은 10월30일까지 62차례 가져 연인원 220만명이 관람했다. 이 가운데 남쪽에서 1인당 약 5만원씩의 입장료를 주고 본 관람객 수는 8천여 명이다./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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