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연
잃어버린 사랑, 빼앗긴 조국…하늘을 품었던 ‘비운의 여인’
평생의 꿈을 이루는 그 순간, 가장 비참한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서 있다. 조국과 자존심도 버린 채 그토록 소망해왔던 일이지만 사랑도, 후배도, 그리고 삶의 정당성마저 잃어버린 그에게 남겨진 게 과연 무엇일까. 박경원에게 하늘을 날만큼 기분 좋아야 할, 하늘을 나는 일이 굴레가 돼버린 영화 속 한장면은 이 영화가 과연 뭘 보여 주고자 하는지 분명히 드러낸다.
올 한해를 마무리할 블록버스터가 드디어 모습을 공개했다. 제작기간만 3년. 제작비 93억원이 제때 충당되지 못해 촬영이 중단되기도 몇차례. 그럼에도 윤종찬 감독은 끝까지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마치 박경원이 그랬던 것처럼. ‘태풍’에 이어 ‘청연’ 역시 한국 영화의 촬영기술이 이젠 꽤 업그레이드됐음을 느끼게 해준다. 깨끗한 화면 속에 펼쳐지는 비행장면은 압권. 복엽기(複葉機)의 고공비행 장면은 스릴과 시원함을 함께 전해준다.
“비행에서 오는 감정의 굴곡과 착잡함을 담으려 했다”는 윤 감독의 의도는 감히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개봉 직전 박경원의 친일 행적 논란이 불거졌다. 이에 대해 “피해갈 생각은 없었다. 사실(史實)이니까. 영화를 보면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던 윤 감독의 발언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드러난다.
영화는 오히려 박경원의 친일 행적이란 좋은 소재를 활용했다. 자신의 꿈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던 한 여자의 삶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들어 주는 더할 나위 없는 소재다. 박경원(장진영 분)은 하늘을 날겠다는 꿈 하나로 일본 비행학교에 입학한다. 고학생인 그는 밤에는 택시 정비를 한다. 대타로 택시를 몰았던 날 평생의 운명이 될 남자 한지혁(김주혁 분)을 만난다. 그는 친일파 아버지를 둔 까닭에 방황하며 자기 자신을 방치하며 살아간다. 아버지의 명령대로 군에 입대한 한지혁이 1년 후 박경원의 비행학교가 있는 부대에 배치받으며 두 사람은 사랑과 믿음을 키워간다. 여기에 귀여운 후배 이정희(한지민 분)와 강세기(김태현 분)까지. 더 이상 행복한 날들이 없다. 스승이자 동료인 다치가와 교관(나카무라 도루 분)까지 곁에 있으니. 거칠 것 없는 박경원에게 적당한 일본인 경쟁자까지 등장한다. 비행학교 경연대회 랠리부문 출전자인 박경원을 밀치고 모델이자 외무성 장관의 애인인 기베(유민 분)가 최종 출전자가 된다. 그는 박경원의 꿈을 알게 된 후 든든한 후원자가 된다. 갑작스런 강세기의 죽음으로 주력이 아닌 고공 비행종목에 출전하게 된 박경원의 비행 장면은 컴퓨터 그래픽이 아닌 실제 협곡에서 촬영됐다.
미국 LA 근교에서 미국에도 단 2대 밖에 없는 스페이스캠과 실제 복엽기 4대, 촬영 전용 헬기 등이 동원돼 촬영됐다. 그만큼 실감나는 영상이 제작진의 노력에 화답했다.
이젠 갈등 국면. 한지혁은 “결혼하자”고 갑자기 조른다. 모든 게 불안하다며. 언젠가 네가 훌쩍 떠나버릴지 모른다며.
‘소름’에 이어 두번째로 호흡을 맞춘 윤종찬 감독과 정진영 콤비에 대한 기대와 신뢰는 충분하다.
오는 29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비행사 박경원 친일행적 논란
장진영 주연 영화 ‘청연’의 실제 주인공 박경원에 대한 친일 행적 논란이 불거졌다. 윤 감독은 “영화를 직접 보면 알겠지만 친일 논란 자체를 회피할 생각이 없었다. 다만 영화적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한 여자의 삶이 있었기에 관심이 갔고, 꿈을 이루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 또는 감내해야 했던 삶을 들여다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작업의 정석
연애 고수들의 작업로맨스 본색을 드러내시지~
“작업은 기술이 아니라 과학”이라고 외치는 남녀가 있다. 자고로 이성에게 작업을 걸기 위해선 스스로 번듯한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법. 외모와 직업, 능력과 끼 등을 겸비해야 한다. 이것은 기본이고 여기에 능청과 내숭, 적당한 속임수 등도 부릴 줄 알아야 한다.
지원(손예진 분)과 민준(송일국 분)은 그런 면에서 제대로 된 선수다. 그런데 각자의 과학으로 강호를 평정해나가던 둘이 그만 눈이 맞았다. 각자 서로의 머리 꼭대기 위에서 놀려고 하는 이들 선수들의 지략과 활약은 상상 이상. 영화는 이처럼 둘의 치고 받는 에피소드를 가볍고 유쾌하게 이어간다. 개봉 1개월만에 전국 230만명을 모은 ‘광식이 동생 광태’ 바통을 이어 12월 연인들을 공략하는 또 다른 느낌의 로맨틱 코미디. 매듭이 촘촘하진 않으나 이만하면 귀엽게 봐줄 만한 매력이 다분하다. 그중 가장 큰 매력은 배우 손예진의 놀랄만한 변신과 활약이다.
일련의 작품을 통해 청순한 매력을 뽐내왔던 그가 “왜 이제야!”란 의문을 불러 일으킬만큼 천연덕스러운 작업녀로 변신했다. 후안무치하고 대담무쌍하며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천연덕스럽게 소화해냈다.
당장 전작 ‘외출’과는 180도 다른 캐릭터. ‘외출’에선 나이답지 않은 성숙한 연기로 박수를 받은 그는 전혀 다른 영화 ‘작업의 정석’을 통해 나이에 꼭 맞는 발랄한 매력을 물씬 뿜어 내는 데 성공했다.
만일 그에게 한치의 주저함이라도 있었다면 이 영화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손예진의 변신 역시 지극히 부자연스럽게 다가왔을 터. 그러나 손예진은 자신이 넘쳤다.
트로트중에서도 아저씨들이나 좋아할만한 노래에 맞춰 몸을 흔들고 양푼에 밥을 비벼 먹다가도 작업의 대상 앞에선 천하의 우아한 공주처럼 구는 그의 연기는 영화의 숱한 빈틈들을 봉합해버린다. 기독교 맹신자처럼 기도하고 찬송가를 부르며, 병원 응급실에선 발작이 난듯한 흉내를 내고 때로는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 구차한 모습도 연출하는 그의 현란한 연기 메들리는 이 영화가 한편의 깜찍한 오락이 되도록 이끈다. 15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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