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순이’

‘삼순이’가 있었다. 사람의 이름이 아니다. ‘공순이’ ‘차순이’ ‘식순이’로 불린 세 가지 직업을 합친 약칭이다.

1950년의 6·25 한국전쟁을 시작으로 50년대엔 식모살이 하기에도 어려웠다. 전쟁통에 그저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하면 감지덕지였다. 덤으로 옷가지나 사주면 고마웠고, 지금으로 말해 월급같은 건 아예 상상도 못했다. 지금 70대의 할머니들 가운데는 처녀적에 이런 ‘식순이’ 고생을 했거나, 안했어도 그같은 세태를 보아온 세대들이다.

‘공순이’는 1960년대 산업화시대의 여공들이다. 노조가 있었던 시기가 아니다. 그야말로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인권부재 속에서도 열심히 일해가며 돈을 모은 알뜰한 인생들이었다. 지금의 60대 할머니들은 그같은 세상을 보아온 세대들이다.

‘차순이’는 버스 안내양들이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버스 안내는 ‘차순이’들이 도맡았다. 특히 서울 시내버스의 경우, 출퇴근 시간이면 승객들로 버스가 미어 터졌다. 정류장마다 그 많은 승객들을 하차 시키고 승차 시키면서 곡예를 하기가 일쑤였다. ‘차순이’마다 몸으로 승객을 밀어붙여 가까스로 태우고는 자신은 승강대에 매달린 채 ‘오라잇!” 소리와 함께 차체를 ‘탕! 탕!’ 두드리고는, 운행 중에 틈새를 만들어 들어가 문을 닫곤하는 개문발차가 다반사였다. 어느 기록에 의하면 1965년도 전국의 버스 안내양 수는 1만7천160명으로 전한다. 대개는 스무살 미만의 ‘차순이’들은 가난으로 배울 때 못배우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이같은 삶의 현장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삼순이’는 근대화의 역군들이다. 오늘의 경제 기반에는 이들의 피땀이 배어 있다.

충남 태안군이 월급을 지원하는 버스 안내양을 두어 관광객들에게 인기를 끈다는 보도가 흥미롭다. 물론 이 안내양들은 옛날의 ‘차순이’와는 다르다. 현대사회는 사람의 육성이 아닌 녹음에 의한 기계가 대신한다. 편리한 것도 좋지만 인성이 그립다. 태안군의 버스 안내양들처럼 예쁜 제복을 입고 승하차와 정류장 이름을 친절하게 들려주는 사람의 육성이 듣고 싶어 진다./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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