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설날과 놀이문화

설이 돌아와 가족들과 윷 한 판을 놀다보니 어렸을 때가 생각난다. 부산 피란시절의 필자, 아니 우리들의 놀이는 무궁무진했다. 아침에 눈을 떠 학교에 갈 때부터 놀이가 시작된다. 학교도 자기가 직접 구해온 굴렁쇠를 굴리면서 가는 것이다. 그 당시 부산(釜山)은 지명에 불 화(火) 자가 들어가 불이 잘난다고 할만큼 큰 화재가 잦았다. 학교에 갈 때도 굴렁쇠를 굴리며 꼭 불난 데를 거쳐 가곤했다. 무언가 놀잇감으로 구할 것이 없어서였다.

피난 시절 천막학교에서도 선생님이 들어오지 않는 시간은 모두 노는 시간이었다.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도 온 몸을 바쳐 놀았다. 여럿이 같이 노는 데는 말타기 놀이가 단연 으뜸이었다. 이외에도 구슬치기는 대단한 인기종목이어서 방과 후 구슬치기를 하다 겨우 장만해준 새 가방을 잃어버리기조차 했었다. 상대편 아이도 나만큼 열중해 캄캄해질 때 까지 서로가 남의 구슬 따먹는 재미로 학교 교정을 한 바퀴 돌아 왔더니 가방이 없어진 것이다. 어른들한테 혼날까봐 밤새 밖에서 눈치를 보다 어른들이 잠든 틈을 타 몰래 방으로 들어가 한켠에서 쭈그리고 잔 일이 지금도 생각난다.

동네로 돌아오면 초량역으로 나가 쌓아놓은 원목더미 사이를 뚫고 들어가 빈 공간에 만든 자기만의 비밀 아지트에 다른 아이를 초대하거나 남의 아지트를 방문하기도 한다. 때로는 여러명이 진지놀이를 하기도 한다. 동네 놀이중에는 여러 명이 같이 노는 연날리기가 단연 으뜸이었다. 물론 연은 혼자 날리지만 방패연(당시 가오리연은 연 축에도 끼지 못했다)의 얼레 만들기와 연 만들기, 사 메기기(유리가루를 풀을 쑤어 연실에다 메긴다. 이는 남의 연실을 끊어 방패연 따먹기 하는데 꼭 필요하다)는 꼭 여럿이 날을 잡아 공동 작업해야 한다. 이처럼 만들어져 연이 동네 여기저기서 올라오면 옆 동네가 이에 질세라 연이 날려진다. 거기서 동네 대장연이라 할 가장 큰 연들은 위로 위로 솟구쳐 오른다. 가물가물 해질 때 까지 오르다 갑자기 “탱금아”를 외치며 다른 동네 연 위를 덮치듯 꽂혀 내린다. 다른 동네 연이 맥없이 끊어져 힘없이 바람에 실려 떠내려간다. 동네 아이들이 함성을 지르며 전리품(연)을 차지하려고 마라톤을 시작한다.

이외에도 많은 놀이가 있었다. 여름이면 바닷가에 물놀이 겸 수영하러 다니기부터 함석으로 물 호루라기 만들기, 헌 권투글러브 얻어다 엉터리 권투시합으로 동네 아이들 랭킹 정하기, 인근에 있는 화교학교에서 밤중에 야외 영화 상영할 때 영화에 몰두해 있는 화교학생 뒤통수 때리고 도망가기, 놀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놀기에 가까운 원자재인 폐타이어 굴려오기(필자 아버지가 폐타이어로 슬리퍼 만드는 가내수공업 공장을 운영하셨다), 무허가 판잣집(당시는 이를 일본말 그대로 ‘하코방’이라고 불렀다) 지을 못을 들고나가 하는 못치기, 못을 기차 레일 위에 올려놓고 칼 만들기, 심지어는 기차역 저탄더미에서 탄가루 뭉쳐 훔쳐오기 등 생계형 놀이까지 많은 놀이를 하며 자랐다.

지금은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이런 놀이들을 통해 어떻게 성장한 것일까? 호기심이 많기도 하지만 유달리 다른 사람들과 같이 놀기를 좋아했다. 소위 잡기가 많았다. 필자가 그렇기도 했지만 좀 거창하게 이유를 대자면 다른 사람들과의 놀이를 통해 사회적 공공성의 원리와 삶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에 잘 노는 게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전통 민속명절이 복원됐듯 설을 전후해 모여든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도 제대로 된 놀이문화가 생겨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 정 헌

화가·공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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