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시간(時間)의 여행

올해는, 아니 지난해 12월이니까 지난해라고 해야 옳을지 모르지만 추위가 빨리 찾아 왔다. 마치 시베리아의 동장군이 기습이라도 해오듯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초겨울에 영하 10℃ 이상 내려가는 한파를 몰고 쳐들어 온 것이다. 젊었을 때 같으면 견딜만하다고 버텼을텐데, 필자 부부는 혼비백산, 어딘가 더운 나라로 피해 가자고 했다. 그래서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를 갔다 오고 다시 필리핀을 찾았다.

필리핀은 섬 7천여곳으로 이뤄진 섬나라지만 우리 부부가 찾아간 곳은 레이테섬의 올목이란 소도시였다. 필리핀은 동장군의 맹위를 피하는데는 알맞은 곳이었다. 더운 날씨지만 해변이라고 바람이 불어오면 서늘해 상쾌했고 무엇보다 물가가 저렴해 마음이 편안했다. 사람들도 마닐라.

같은 대도시와는 달리 소박하고 친절했다. 단 하나 문제가 있다면 치안이었다.

하지만 심각하진 않았다. 물가가 싸긴 하지만 그만큼 가난하고 못산다는 현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6·25전쟁 당시, 그러니까 반세기 전에는 우리보다 훨씬 잘 살았다는 필리핀이 전쟁을 겪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가난하고 힘들어 보이는가….

광장에 자리 잡은 노천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는데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젊은 여성이 나타났다. 마닐라에 있는 대학을 다니는데 등록금이 없어 휴학하고 몇자리 되지 않는 노천카페를 아르바이트로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필리핀의 현실을 통탄하고 필리핀의 문제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첫째로 인구문제를 들었다. 필리핀 인구가 30년 전 3천만명이었는데 지금은 9천만명에 이를 정도로 인구 증가율이 폭발적이라는 것이다. 폭발적인 인구 증가에 비해 일자리는 늘지 않으니 실업문제가 심각하고 교육문제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교육시설이나 교사들이 태부족, 교육이 절망적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권력층의 부패문제, 언어와 인종문제, 그리고 과거의 식민통치 등이 국민들을 망쳐 놓았다고 주장했다. 그녀가 “스페인이 400년, 미국이 100년, 일본이 50년 등”으로 열변을 토하길래, “스페인의 400년은 몰라도 미국은 50년, 일본은 6년이 아니냐”고 말했다. 그러자 “점령기간과 통치기간은 그럴지 몰라도 그들은 각각 1세기와 반세기동안 식민지통치의 해독을 남기고 갔다”고 맞받아 쳤다.

그녀의 얘기를 들으며 반세기 전 우리를 생각했다. 마치 50년이란 시간이 거꾸로 흘러 당시 우리의 어려웠던 현실을 필리핀에 와 다시 보는 것 같았다.

우리가 그 어려웠던 역사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정말 기적이었다. 30년새 3배로 늘어난 인구 팽창을 걱정하는 필리핀. 그런가 하면 30년이면 인구가 절반 이하로 줄 것이라고 걱정하는 한국. 각기 걱정거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자랑스럽다. 그러나 반세기 후 또 상황이 역전될지도 모른다. 시간과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열대지방의 황혼은 짧지만 아름답다. 레이테섬은 미군이 최초로 상륙한 곳으로 격전지였다. 필자가 5년만 더 빨리 태어났어도 일본군에 끌려와 미군들에게 처참하게 당했을지도 모른다. 60여년 전 이 섬에 끌려왔을지 모르는 그들을 생각하고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며 여수를 달랬다.

/김 정 옥 예술원회원·얼굴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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