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을 위한 ‘서장대’ 이야기

인격이 의심되는 한 남자의 잘못으로 유네스코가 1997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수원의 ‘화성(華城·사적 제3호)’ 유적 중 하나인 서장대(西將臺) 누각이 소실(燒失)됐다. 이미 보도된대로 “카드 빚이 있어 고민하다 혼자 술을 마시고 홧김에 불을 질렀다”는 방화자의 횡설수설에 치미는 울화를 금할 수 없다.

서장대가 불에 타자 ‘세계문화유산에 소화전도 없다니’ ‘불안한 사회상 반영하는 묻지마 방화’라고 여론들이 문화재 관리 허점을 질타했다. 그렇긴 하나 “단순 화재와 달리 방화는 의도적으로 불을 지른다는 점에서 대책을 세우기가 정말 난감하다. 수 많은 문화유산을 문화재청이나 소방방재청이 일일이 다 지키고 서 있을 수 없지 않느냐”고 문화재청이 말했듯이 사실 방화는 일방적으로 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난 4월 26일에도 서울 창경궁 문정전에서 한 관람객이 신문지와 부탄가스통을 이용해 불을 질러 문정전 왼쪽 문이 타고 천장이 그을리는 사건이 발생했었다. 만약 불길이 번졌다면 문정전에서 불과 20여m 떨어진 곳에 즐비한 국보 226호 명정전 등 창경궁의 국보급 유적들이 멸실될 뻔 했다. 방화자가 부탄가스통을 4개나 들고 입장했음에도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고궁을 찾는 사람들의 가방과 소지품을 하나하나 조사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정조대왕이 군사훈련을 총지휘했던 서장대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서장대는 수원 시가지 중심에 있는 해발 128m의 팔달산 정상에 위치한 유적이다. 새벽 1시가 넘은 시간에 산에 올라와 몰래 불을 지르는 행위를 무슨 수로 막겠는가. 순찰을 한다 하여도 순찰자가 지나간 뒤 방화하면 속수무책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방화사건을 너무 학술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다. 예컨대 “기존 체제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라거나 “분노나 복수심의 표출 행위”라고 분석하는 경우다. 물론 사람에게 미치는 사회적 영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범죄는 개인의 심성선악(心性善惡)에서 기인된다고 봐야 옳다. 모든 걸 ‘세상 탓’으로 돌린다면 ‘묻지마 살인자’와 ‘묻지마 방화자’들은 가당찮게도 명분까지 내세운다. 살인, 강도, 강간과 함께 4대 강력범죄의 하나인 방화를 중형으로 처벌해야 하는 당위성이다. ‘홧김에’ 혹은 ‘술김에’ 불을 지르는 범죄에 우리나라는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얘기다.

문화재 방화는 외국에서도 여러 차례 있었다. 황금빛 누각이 볼거리인 일본의 금각사(金閣寺)는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오른 교토의 상징이다. 1950년 비오는 날 아침 이 절에서 수도하던 21세의 승려가 누각에 불을 질렀다. 경찰에 붙잡힌 방화범은 “너무 아름다워 질투를 느꼈다”고만 했다. 기원전 356년 그리스 에페소스의 헤로스트라투스라는 사람이 아르테미스신전에 불을 놓았다. “어차피 나쁜 짓을 하려면 후세까지 알려질 악행을 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방화범은 120년에 걸쳐 지은 아르테미스신전 같은 걸작을 훼손해야 이름이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우리나라 문화재를 훼손시킨 사람들도 아마 그와 다르지 않을 터이다.

‘서장대 방화’라는 ‘날벼락’을 맞은 화성사업소가 앞으로 6명이 매일 순찰을 돌기로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화성에는 서장대만 있는 게 아니다. 대궐에 버금가는 화성행궁과 창룡문·화서문·팔달문·장안문 4대문을 비롯, 화홍문·방화수류정·화양루·동장대 등 수많은 목조건물 문화재들이 방화에 노출돼 있는 상태다. 당국의 완벽한 관리는 당연하다. 그러나 가장 먼저 선행돼야 할 것은 문화유산을 내 집, 내 재산처럼 여기는 국민의식이다. 엊그제 팔달산에 올라 화성을 돌아보면서 1970년대엔 낙뢰(落雷)로, 10년 전엔 방화로 피해를 당했던 서장대의 옛 모습을 떠올렸다. ‘화성성역의궤’를 중심으로 또 복원하겠다고 했으나, ‘1명 도둑을 100명이 지키기 어렵다’고 또 누가 미친 짓을 할런지 참으로 걱정스럽다.

그러나 16대(1985·10·7~1989·12·27) 수원시장을 역임한 유석보(柳錫輔) 선생이 재임시절 수원시공무원 월례조회 훈시를 통해 “나는 우리 수원성벽의 돌을 혹 누가 한개라도 빼갈까봐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고 말한 것 처럼 모든 사람들이 진정으로 문화재를 아끼고 사랑한다면 소중한 문화유산은 안전하게 영원히 보전될 것이다. “비 오는 밤이면 성벽이 무너질까봐 잠을 설쳤다”는 유석보 선생같은 마음으로 ‘성곽의 꽃, 화성’을 수호하는 화성사업소의 분발을 재삼 당부한다. 고색창연한 ‘화성’이 오늘따라 더욱 소중하고 아름답다.

/임 병 호 논설위원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