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우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 추풍 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노매.”(계량),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둘에 내어 /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 어른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황진이), “내 언제 무신하여 임을 언제 속였관대 / 월침 삼경에 온 뜻이 전혀 없네. / 추풍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하리요.”(황진이),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 일도 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황진이), “어져 내 일이여, 그럴 줄을 모르더냐. / 있으라 하더면 기랴마는 제 구태여 /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황진이), “꿈에 뵈는 임이 신의 없다 하건마는 / 탐탐히 그리울 제 꿈 아니면 어이 보리. / 저 임아, 꿈이라 말고 자주자주 뵈시소.”(명옥), ”매화 옛 등걸에 봄절이 돌아오니 / 옛 피던 가지에 피염직도 하다마는 / 춘설이 난분분하니 필동말동 하여라.”(매화), “멧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의손데. / 자시는 창 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 밤비에 새잎 곳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홍랑), “어이 얼어 자리, 무삼 일 얼어 자리. / 원앙침 바취금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한우)
우리나라 고전문학사에 길이 남을 이 시조작품을 쓴 사람들은 기생들이다. 불후의 시조시인으로 꼽히는 송도 명기 황진이(黃眞伊)는 시조뿐 아니라 한시도 많이 남겼으며, 특히 서경덕과의 일화는 유명하다. 부안 명기 이매창(李梅窓)은 당시 문인이며 명신인 허균·이귀 등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조선 중종 때 선비들이 그녀의 시비(詩碑)를 세워주었다. 송이(松伊)·소춘풍(笑春風) 등 시조시인으로 이름을 남긴 기생들이 상당수에 이르는데 그녀들이 국문학에 끼친 영향 중 가장 큰 것은 고려가요의 전승이라 하겠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짙은 정한(情恨)의 고려가요는 대부분 그녀들의 작품으로 보여지는데 얼마전 19세기 전반 평양의 기생 67명과 기방 주변의 남성 5명의 삶을 그린 산문 소품 ‘綠派雜記’가 공개됐다. 환락적 풍모나 ‘성 노리개’식의 부정적 인상과는 거리가 먼 기생들의 삶이 진솔하게 담겨 있어 예혼을 불러 일으킨다.
/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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