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란의 6월

“배달민족의 피가 흐려져서 걱정입네다” 지난 5월 남북장성급회담에서 북측 대표가 한 말이다. 회담에 앞서 가진 환담에서 농촌 얘기가 나온 끝에 남측 대표가 중국 베트남 필리핀 등지 여성이 국제결혼으로 우리 농촌에 많이 와 있다는 말을 하자 그같이 되받아 쳤다.

조국통일범민족연합남측본부와 한국대학총학생연합 등이 어제부터 모레까지 광주에서 북측 대표단과 함께 갖는 ‘6·15 공동선언발표 6돌 기념 민족통일 대축제’는 민족이 주제다. “우리 민족끼리의 날, 3대 애국운동(자주통일·반전평화·민족대단합) 결의대회를 민족공조의 의지로 다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의 공산주의엔 국제공산당만 있을 뿐 민족은 없다. 공산당선언과 코민테른은 민족의 개념은 되레 공산주의운동의 방해물로 보았다. 오직 국제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1국1당 체제의 개방만이 있을 뿐 민족의 개념은 저해 요인으로 말살을 강요 받았다. 광복직후 독립을 미루는 강대국의 신탁통치안을 우익 진영과 함께 반탁에 나섰던 좌익 세력이 하루 아침에 찬탁으로 돌아섰던 게 모스크바에서 날아든 지령 때문이었다. 그 무렵에는 우익을 민족진영이라고 했고 좌익을 개방세력으로 보았다. 김일성 장군에게 붙은 ‘인민의 태양이시며’ ‘강철의 영장이시며’ 등 여러가지 수식어 외에 또 한 가지가 더 있었던 게 ‘국제공산주의운동의 탁월한 영도자 중 한 분이시며…’란 말이 있었다.

이토록 공산주의운동에서 금기시됐던 민족이란 용어를 금과옥조로 삼게 된건 ‘우리식 체제’ ‘우리식 사회주의’를 시작하면서다. 권력 승계의 ‘우리식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폐쇄사회가 불가피했고, 폐쇄사회를 합리화하기 위해 남반부 혁명과 함께 반미운동의 구심적으로 내세운 게 민족이다. 물론 민족이란 말은 더 할 수 없이 좋다. 민족자주, 민족공조 참으로 좋은 말이다. 나쁜 것은 그 말 자체가 아니라 이를 인도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왜곡하는 정치 공작이다.

‘반전평화를 위해 남조선을 강점하고 있는 미군을 몰아내야 한다’고 한다. 미군을 몰아내야만 반전평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미군이 있다고 반전평화가 없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미군을 불러들인 게 6·25 전쟁을 일으킨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다. 도대체 6·25 전쟁과 6·15 남북정상회담의 차이는 뭔가를 생각해 본다.

부시 미국 대통령은 잘못된 정보로 무고한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전범이다. 6·25 전쟁의 전범은 누구로 보는가 궁금하다. 민족자주 민족공조를 말하자면 이를 먼저 짚고 넘어가는 것이 순리다. 매듭을 풀지않고 어떻게 진정한 민족 화해가 성립되겠는 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6·25가 없었으면 굳이 6·15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전쟁을 하지 않았으면 불신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과 함께 남북조절위원회가 가동됐다. 적십자회담은 이때부터 시작됐었다. 김영삼 정권 시절 김일성 주석의 돌연한 변고가 없었던들 남북정상회담은 이미 그때 성사됐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6·15 정상회담 이면엔 이처럼 7·4 공동성명, 김영삼·김일성 ‘양김회담’ 합의의 전력이 밑거름으로 깔렸다.

6·15 이후 남북관계가 활발한 것은 사실이지만 천문학적 수치의 각종 물품과 달러가 북녘에 지원됐다. 이러면서도 좋은 소릴 듣기는 커녕 매사를 북측에 끌려만 다닌다. 문제가 많지만 참는 데, 참기 어려운 게 있다. 1994년 박영수 조평통 부국장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든다”고 했던 것은 6·15 이전이니까 그렇다 쳐도, 며칠 전 안경호 조평통 서기국장이 “전쟁의 화염에 휩싸이게 될 것”이라고 한 말은 정말 고약하다. 이토록 대놓고 협박한 사람이 정중한 대접을 받는 평화의 손님으로 광주에 초대 됐다.

오늘의 남북관계에서 거북한 과거의 상처가 덧나지 않기 위해 아직은 미완의 봉합을 손대지 않는 것이 좋다면 서로가 인도적 동포애로만 가야 한다. 그런데 동포애를 민족론으로 이념화시켜 순수성을 희석시키는 것은 매우 우려스런 현상이다. 이념적으로 편향된 사람들이 갖는 6·15 이념행사는 6·15 정신이 아니다. 6·25를 외면한 6·15의 모순은 광란의 6월이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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