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비평/고전의 현대적 재해석, ‘현대성’성취의 문제다

가족윤리가 서로를 억압하는 폭력으로…우리의 고전해석 한계 불구 의미있는 시도

그동안 우리 연극계가 창작극의 활성화와 다양화를 위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왔던 과제 중의 하나가 바로 ‘전통의 현대화’이다. 이것은 대체로 굿이나 탈춤과 같은 전통극의 양식을 독창적인 형식미학으로 수용하거나 혹은 널리 알려진 고전의 서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 왔다. 어떠한 경우든 ‘전통’보다 ‘현대성’에 방점이 찍히기 마련이며, 작품으로부터 현대적 의미를 찾아내는 데에 관극의 초점이 맞추어지게 된다. 이것은 지난 6월 21·22일, 과천시민회관 소극장에서 공연된 ‘아! 심청, 하룻밤이 천년이어라’(극단 ‘짓패 21’, 심길섭 작·연출)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 이 작품은 ‘심청전’의 서사적 모티프를 바탕으로 극적 서사를 재구성한 것으로서 무엇보다도 원작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해석하였는가 하는 부분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아! 심청, 하룻밤이 천년이어라’는 점점 황폐해지는 가족관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효녀 심청의 행위를 통해 효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한편, 심청과 심학규의 내면적 갈등을 통해 가족애 회복을 위한 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한 작품이라고 한다(공연 프로그램).

‘효’와 ‘가족애’의 현대적 의미를 재발견하는 데 공연의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연 이 연극은 인물의 성격, 갈등의 유형, 서사의 전개 면에서 원작과 다른 점을 보여준다. 프롤로그를 포함하여 전 10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개막 부분과 대단원 부분에 심학규가 심청을 죽이는 장면을 배치하고, 현재와 과거의 장면을 교차적으로 전개시키면서 두 인물의 갈등을 점진적으로 발전시킨다. 갈등의 표면적인 원인이 ‘가난’ 혹은 심학규의 ‘신체장애’(시각장애)에 있다는 점에서는 원작과 다를 바 없지만, 인물들의 구체적인 갈등해결 방식 면에서 원작과 결정적인 차이성을 보여준다. 현대판 심청은 아비를 봉양하거나 눈 뜨게 하기 위해 남자 친구 강영철에게 돈을 구걸하고 그의 아버지 강 대감을 회춘시키는 일을 하며, 심학규는 생계유지와 자식 양육을 위해 양성애자 장사연의 관음증적 욕망을 해소시켜 주는 일을 한다. 이것은 극작가(혹은 연출가)가 극적 갈등의 본질적인 원인을 ‘가족 윤리’의 문제로 이끌어가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극이 전개될수록 두 인물의 성적인 일탈 행위가 전경화 되고, 이로 인해 극적 갈등은 개인의 실존적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심각한 내적 갈등의 양상을 띠게 된다. 두 인물이 고통스러운 것은 ‘가난’이나 ‘신체장애’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강요된 ‘효’나 ‘가족애’와 같은 가족윤리나 책임의식 때문이다. 무능력한 아비 때문에 심청은 여성으로서의 자존감을 훼손 당하고, 딸과 함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심학규는 성적으로 굴욕스러운 관계를 선택하는 것이다. 두 인물은 가족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개인적 욕망과, 서로를 부양해야 한다는 강박적 책임의식 사이에서 치열하게 갈등하다가, 어떠한 해결책도 찾지 못하고 ‘죽음’이라는 파국에 이른다. 고전의 서사에서 미덕으로 그려졌던 심청의 ‘효’와 심학규의 눈물겨운 ‘부성애’가 이 공연에서는 아비와 딸을 억압하고 구속하는, 일종의 ‘폭력’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이 극이 ‘심청전’과 뚜렷하게 변별되는 것은 ‘효’와 ‘가족애’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처럼 원전과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이 작품이 현대성을 성취하고 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고전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이 현대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사건, 캐릭터, 갈등과 같은 극의 구체적인 요소들이 현대적인 관점을 반영해야 하며, 이를 통해 구현된 주제가 현대 대중들의 의식과 정서에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이 작품의 경우, 현대적인 문제의식과 관점으로부터 출발하여 새로운 서사를 제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도한 문제의식과 귀결된 주제의식이 일치되지 않는 결정적인 한계를 드러내고 만다. 효와 가족애의 가치를 환기시키기 위해 기획된 작품이 결과적으로 그것의 폭력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주제의식마저도 구체적인 서사의 전개 과정에서 힘을 잃는다. 심청과 심학규가 물질적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가진 자의 성적(性的) 대상이 되고자 하는 것은 안일한 문제해결 방식이 될 수 있다. 이처럼 인물들이 문제적 상황에 직면하여 치열하게 대결하지 않기 때문에, 이 작품은 내적 갈등의 심도를 잃게 되며, 대단원의 비극적 장면에서 관객에게 진한 페이소스를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들은 ‘심청전’의 ‘인신공희’라는 서사적 모티프를 현대적인 극적 서사로 재구성 하는 과정에서 현대사회의 병적 징후를 드러내는 편린들, 즉 가족의 유대감 상실, 빈부격차의 사회구조적 문제, 문란한 성문화 등과 같은 다양한 문제들을 하나의 주제로 통일시키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이것은 고전의 서사를 현대극으로 재창조한 작품에서 빈번하게 발견되는 결함이기도 하다. 원작과 다른 새로운 관점을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증으로부터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연극계에서 고전의 현대적 재해석 작업이 주로 희랍 비극이나 셰익스피어 작품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던 것을 고려할 때, 이와 같이 한국 고전의 서사를 현대의 무대로 가져오려는 시도는 한국 연극의 발전에 생산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아! 심청, 하룻밤이 천년이어라’의 공연은 일정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시도였다고 평가할 만하다. 이번 공연을 계기로 극단 ‘짓패 21’이 고전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무대화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고민한다면, 그들만의 고유한 창작극 레퍼토리를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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